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으신다면 (2)

감사가 먼저일까, 감사일기가 먼저일까?

내가 감사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스물세 살이었다. 그건 엄마의 반강제적 권유였다. 어느 날 신문에서 감사일기 쓰기를 통해 불행했던 일상을 뒤로하고 다시 행복을 찾은 한 가정에 대해 읽은 엄마는 그날로 언니, 나, 남동생을 모두 한 자리로 불러 모았다. 그러곤 감사일기가 인생에 불러오는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마지막엔 "오늘부터 가족 카톡방에 자기 전 그날 감사했던 일을 다섯 개씩 써서 올리는 게 좋겠다!"라는 다소 강제성이 들어간 제안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말을 받아들일 이유보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을 텐데 그 당시 나는 꽤 순순히 엄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궁금했던 것 같다. 그게 진짜 그렇게 좋을지. 그때 나는 학부 졸업 준비와 대학원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은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한 뒤 곧장 독서실로 가서 대학원 진학 공부를 새벽 한두 시까지 하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나의 얼굴에선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가끔 버스를 타면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감사일기를 쓰라는 엄마의 말을 '그래, 이거 하나 해서 좋은 게 그렇게 많으면 한 번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따랐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 힘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될지.


감사일기를 쓰는 건 쉬웠다. 매일 자기 전 침대에 누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고 감사했던 일 다섯 가지를 꼽아 쓰는 것이었다. 감사일기에 올라가는 것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기분이 좋아짐에 감사합니다. 친구 OO이가 커피를 사줘서 감사합니다. 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바로 도착해서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건 꾸준히 쓰는 것이었다. 처음엔 습관이 되지 않아 며칠씩 빠뜨리곤 했다. 하지만 가족 카톡방에 감사일기를 올려야 했기에 누군가 며칠씩 쓰지 않으면 다른 가족들이 감시자 역할을 하며 빨리 올리라고 재촉했다. 그 덕분에 감사일기 쓰기는 곧 습관화 됐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뇌전증 발병 후 인생에서 끝이 없는 깜깜한 터널을 걷는 듯 느껴지던 때, 그전에도, 그리고 그 당시에도 쓰던 감사일기 덕분에 그 시기를 지나갈 수 있었다고.


감사일기는 내게 해독제와 같았다. 아무리 비참한 날에도 감사일기를 쓰고 자면 그 다음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힘이 생기는 듯했다. 특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하던 시기엔 감사일기를 열 개씩 썼다. 자기 전 가족 카톡방에 쓰는 다섯 개 외에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다이어리에 다섯 개를 더 썼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마른걸레에서 물기를 쥐어짜듯 감사할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섯 개를 아침에 추가로 쓰기로 처음 마음먹었을 땐 나도 이와 비슷하게 나의 말라버린 마음에서 물방울 하나라도 쥐어 짜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다이어리를 펴자마자 1번, 2번, 금세 5번까지 술술 써내려 갔다. 나의 감사 찾기 레이더는 그동안 생각보다 더 잘 발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 아침에 운동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맛난 점심 도시락을 싸주신 엄마께 감사했으며, 그날 유튜브에서 우연히 클릭한 플레이리스트가 맘에 들어 감사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자리가 금방 생겨서 앉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무엇보다 내가 그날도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저 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커다란 감동이었다. 


감사일기는 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오늘도 이빨은 깨지고, 뒤통수엔 자몽만한 혹이 생기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온몸이 뒤틀렸다는 수치심이 나를 집어삼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여전히 감사할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나는 하루를 마감하고, 또 그다음 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던 시간이 있었다. 3년이 넘도록 증상이 없던 시기였다. 그때 나의 감사일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고 아름다웠다. 미친 듯이 무섭고, 눈물 나는 하루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루들을 모두 잘 마무리했음에, 그리고 그 기간이 1년, 2년, 3년 늘어남에 무한히 감사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곧 약을 조금씩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약을 조금씩 줄이다 보면 언젠간 약을 끊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Dream Come True였다. 


그러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내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염원해 온 그날.


6개월 만에 간 정기검진 날 나의 담당의 노의사에게서 약 줄이는 걸 시작하자는 OK 사인을 받았다. 




뇌전증에 관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QnA #8

Q: 뇌전증에 도움이 되는 식단이 있나요?
A: 네, 뇌전증 환자들에게는 대부분 케톤식이 권장됩니다. 식단에서 빵, 파스타와 같은 탄수화물의 비율은 낮추고 버터, 베이컨과 같은 지방의 비율을 높이는 식단입니다. 이런 저탄고지 식단은 다양한 발작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뇌전증지원센터)
이전 08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으신다면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