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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14. 2019

여기를 사랑하는 연습

채소김

 *방 앱을 켜서는 어디로 이사갈지 찾아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힙한 곳, 열린 청년들이 모여 있는 곳, 전시와 공연을 수시로 볼 수 있는 곳, 밤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있는 곳, 자주 가는 비건 식당이 있는 곳. 내가 사는 동네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힙하기는커녕 낡은 간판과 오래된 집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청년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마련되어있지 않은 거 같다. 전시이나 공연을 보려면 같은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1시간을 잡고 이동해야 한다. 밤에 산책을 하려면 어두컴컴하고 재미없는 골목길을 감내하고 나서야 한다. 비건 식당을 바라는 건 욕심인 듯 거리의 주류 가게들은 육식, 육식, 육식이다. 라고,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한 게 벌써 1년이다. 그럼에도 이 곳에 있는 이유는 회사까지 걸어서 10분이라는 거리 상의 장점 때문이다. 계약 기간도 아직 남았고. 그럼에도 이 곳은 언젠가는 마땅히 떠나버릴 곳이다.


 어느 날엔가 친구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운 일도 찾고, 새로운 주거 공간도 찾고 싶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순간 지겨웠다. 내가 가진 이야기 꾸러미 대부분이 이렇게나 다분히 흙빛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내가 있는 공간을, 또는 나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 대부분의 여기에 있는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중학교도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아니었는데 갔고, 고등학교도 내가 가야만 했던 곳이 아닌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갔다. 대학교 또한 나의 선택이었지만 경제적 안정을 위한 차선이었다. 억울함 때문이었던 거 같다. 줄곧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편안하게 만족하며 지내는 이들을 보면 답답했고, 소외감을 느꼈다. 저들은 왜 아무 생각이 없지? 왜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지? 왜 나만 이렇게 부적응하는 걸까? 괴롭다. 도망가고 싶다. 그렇게 떠났다. 집과 학교를. 한 번은 호주로 한 번은 서울로. 그렇다면 그 곳에서는 만족했을까? 나는 또 만족하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한정된 휴학의 시간은 내 안의 역마를 힘껏 끌어올렸다. 그렇게 떠나고 또 떠났다. 떠나는 순간을 위해서 머물렀다. 떠날 때 비로소 자신이 특별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학에 돌아와서도 그랬다. 특별해지려고 몸부림을 쳤다. 강의실을 일부러 일찍 떴고, 나를 아껴주었던 이들로부터 떠났다. 일상보다는 환상을 동경했다. 환상 속에서도 또 다른 환상으로, 새로운 환상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지그시 머무르지 못했다. 그렇게 일상의 푸근함과 일상 속의 미소를 바라보지 못했다.


 환상을 향유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일상을 부정하는 환상은 하루 종일 잠 속으로 침잠하는 것과 같다. 낮이 없고 밤만 있는 삶. 삶에는 낮과 밤, 그 사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다가오는 밤과 다가온 밤만을 긍정한다면, 떠나가는 밤 다시 말해 다가오는 낮과 다가온 낮은 슬픈 시간일 뿐이다. 주어진 삶의 반만 사랑하는 삶은 원하지 않는다. 전부를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오만이지만, 사랑의 반경을 넓히자는 다짐은 해볼만 하다. 낮이라는 일상을 사랑하는 연습을 시작해보련다. 나의 동네와 나의 공간을 사랑해보련다. 그러고보니 내 동네에서 좋아하는 풍경이 소소하게 그려진다. 지하철 앞에서 과일 파는 풍경, 집으로 가는 길목의 전선과 그 사이의 달빛, 권나무의 ‘자전거를 타면 너무 좋아’를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바라보는 풍경, 늦게 퇴근하는 이들을 위해 12시 넘어서까지 불을 켜놓는다는 동네의 한 상점. 그 곳에서 나의 환상도 펼쳐보면 좋겠다. 청년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곳에서 전시도 열고, 공연도 소소히 열면 좋겠다. 다른 공간을 선망하는 환상이 아닌, 내가 있는 공간에서의 환상을 품으며 일상의 나날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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