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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ndtic Hannahism Oct 02. 2023

에서의 저주는 정말 저주인가?

망한 하스스톤 덱과 니체와 까뮈에게서 생각하는 저주에 관하여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창세기 27장 발췌


해당이야기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을 들었을 리브가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서는 자신의 힘을 믿었으니 하나님으로 버림을 받아 저주를 받았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믿음을 의지해서 따라갔을 때 축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야곱에 이입이 되지 않았다. 에서가 한없이 가엽고 그저 먼저 태어났고 조금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들의 마음이 친어머니에게 그리도 무참히 짓밟혀도 되는가 하고 아주 어렸지만 그런 생각을 종종 하였다.

사람들은 에서가 되기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자신들이 야곱이 되겠노라고 힘껏 노래하며 열심을 내었다.

그래서 반대로 내게는 내가 에서 같아서 인생은 저주를 받았다 생각한 적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뒤 돌아보며 생각하기를 ‘어째서 내 인생의 하스스톤 초반 덱은 다이아 6 짜리만 나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그저 상대에게 당하기만 하는가?’ 했다. 운빨망겜-운에만 치우쳐 승리가 정해지는 망할 게임-이라고 내 인생이 하스스톤이랑 다른 게 무엇인가 방어하나 할 수 없이 모진 공격을 순전히 다 받아내고 산화되어 체력이 1쯤이 되어 이제 소생하려고 기어 다니다 보니, 내 덱은 왜 이리 나쁜 카드만 있는 것인가 원망을 참으로 많이 했다.


내가 태어날 때 정해진 운이 누군가에게 다 쏟아져서 

조물주라는 이가 '아 너에게 줄 카드가 없네 ㅈㅅ ㅋㅋ…' 이래버린 상황 같았다.

그러던 중에 D언니를 알게 되었다. 작고 예쁜 언니는 항상 자존감이 넘치고 자신의 모습을 흉터마저도 예쁘다 스스로 여기는 내 눈엔 태양같이 빛나는 존재였다. 언니를 대하면 마음이 기쁘고 흡족하다가도 왜 나는 그러지 못하는 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생각보다 어린 시절의 공통점이 좀 있었고 기질도 비슷했지만 가족지지라든지 여러 가지의 상황이 나와는 전혀 달랐고 내가 어찌할 수 없던 것이지만 [시험군의 조건을 실험자가 조정하지 피험자가 어떻게 임의로 바꿀 수 있겠는가 …] 언니의 발현은 한 없이 따뜻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먼저 배우고자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했고 그렇게 언니가 참 좋은 사람이 돼 주었다. 


오늘 아침에 머리를 말리다 문득 저 창세기 27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서가 받은 저주가 정말 나쁜 것인가. 그 후로 살아가는 모든 길이 에서에게 저주로 슬픔만 있었는가? 종교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것을 인생이라 생각하고 니체가 말하는 땅에서 내가 스스로 주인으로 신으로 서는 것에 대하여 대입하여 볼 때. 상당히 많은 부분이 저주가 아닌 나름의 멋진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곱이 나간 후 이삭이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에서는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슬피 울면서 자신에게도 축복을 내려 절규한다. 아버지는 너무도 매정하지만 줄 축복이 없고 저주뿐이라 한다. 


나도 슬피 울 때가 참 많았다. 따돌림과 툭하면 날아오는 미움에 대하여 나도 다른 이처럼 예쁨 받고 싶은 강렬한 생각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미움을 덜 받을까 생각하는 마음에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 내게도 예쁨 받을 만한 것을 주세요’ 하고 기도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도가 실존하지 않는 존재에게 닿을 리 만무하였고 공허함 속에 흩어지는 입김처럼 사라지기만 했다. 


그러던 중에 D언니를 만나 언니를 보면 내 행운이 내가 받았어야 할 모든 예쁨이 언니에게 간 건 아닐까? 

먼저 태어나서 조물주라는 존재가 뭔가 쏟아 줄 때 그 유명한 밈처럼 '어이쿠' 하면서 다 쏟아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웃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이다. 내가 언니를 좋아하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니체를 알고 까뮈를 생각할 때에 저 저주는 사실 저주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삶이었다. 

이삭이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따져 본다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삶은 처음 피투 될 때부터 안락하고 편안한 곳이 아닌 돌과 먼지가 가득한 황무지 같고 향방을 알 수 없는 가련한 곳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라며 항상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목마르고 나를 지키기 위한 모진 말로 입안에 혀라는 칼을 차게 되며 저번에 쓴 글처럼 마음에 검을 품고 살수 밖에 없다. 

니체가 낙타로 살며 방황하는 노예로 사는 것에서 원함을 갈구하는 사자가 되어 “너는 해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용을 죽이라 한 것처럼, [신은 죽었고 그 자리에 인간인 내가 삶이라는 대지에 주인]이 되고자 한다고 그렇게 읽었다. 그러면 내가 뭔가 강력한 존재에게로서 받은 것이 아닌 것으로 스스로 일어나 온몸에 흉터를 입어가며 얻어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할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이 부분이 참 생각이 많이 되었는 데, 언니는 내 아우가 아니지만 언니가 밝고 자존감 넘치는 분위기로 나에게 깨우침을 줄 때에 내가 배우고 싶고 더 알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은 것은 저주가 아니라 보였다. 아우가 잘 돼서 아우덕을 본다면 그것이 저주인가? 내가 스스로 살 수 없기에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울 이가 있다면 좋은 것이지 싶었다. 


마지막으로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 대하여서'는, 이것은 까뮈의 시지프 신화가 단번에 생각이 났다.

끊임없이 돌을 굴려서 산에 올리는 삶. 멈출 수없고 거기에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할 수 없지만 그저 자신의 삶이니 침묵으로 저항하는 삶이 생각이 났다. 내가 저항하며 살 수 있는 여력이 있어 생을 어떻게든 살아가며 배우다 그 힘이 다하여 저항도 멈추고 (이 부분에 대하여 쓸 글이 또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아름다운 사람처럼 가야 할 때에 간다면 저 말들이 비단 저주가 아니라 앞으로 청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인생이 이렇다 하고 알려주는 나침판과 같은 실마리가 아니었나… 싶다. 



첨 - 후에 성경을 보면 에서는 그 세력이 커져서 야곱이 두려워하였고 형인 에서 앞에 달려가 안겨 몸을 낮추었다. 아무리 저주라지만 에서가 사자로 살았을 때 저주가 아닌 나침판으로서 장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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