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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Sep 30. 2021

8시간 걸렸어요

단어 암기, 영어 공부의 시작


   처음 만났을 때, 서준이는 중3이었다.  

운동을 (사실은 노는 걸 더) 좋아하던 서준이는 공부에 큰 뜻이 없었고, 학교 성적이나, 친구들의 꽉 찬 학원 스케줄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은 그랬는데, 문득 이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고. 

  그런데 배울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받아주는 학원은 없었고, 동네 아는 이모들의 도움으로 나를 소개받게 된 것이었다. 영어를 해야겠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보다 사실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들 어디서 배워서 공부하는 것인지 되물었다.        

   짧지만 당찼던 자기소개였다. 중3의 여름방학 끝자락에 서준이를 만났다.  


   사교육 필드에서 중학교 3학년은 예비 고입 시즌이다. 고등학교 모의고사 대비를 위해 문제 유형을 익히고 기출문제 풀이가 시작된다. 단어책은 커지고, 독해 지문은 길어지고, 문법 문제의 글자 크기도 작아진다. 아직은 중학생인 그들의 눈에 처음 보는 공부는 어려워진 공부다. 심지어 이것들 모두 고3까지 계속된다 하니 도망도 못 가고 벽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의 시즌이기에, 서준이 입장에서 학년에 맞는 반을 찾으면 진도가, 진도에 맞는 반에서는 학년이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책을 편 서준이는 아직 출발도 전인데, 이미 설 자리를 잃은 듯 느꼈을 것이다.     


   애들 보면, 단어를   개씩 외우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단어가 제일 궁금하구나?!”

  “근데, 진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요. 정말 하루에  개씩 외워야 해요?”


   우리 수업의 첫 미션이 되었다.

공부에 대한, 영어 공부 방법에 대한 모호한 호기심이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도록 그 궁금증을 잘 풀어내야 했다. 학생의 물음표가 수업을 만들어야 했다.


   중학교 단어 교재들 중에서 입문 수준으로, 표지와 구성 디자인을 고려해 서준이 맘에 가장 드는 걸로 골랐다. 1단원에 해당하는 단어 30개를 첫 과제로 정한 뒤, 어떤 방법으로든 다음 시간까지 외워보기로 했다. 

  

   입시를 위한 영어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어디서든 단어부터 외운다. 우선 말을 하려면, 책을 읽으려면, 문장을 적으려면 재료가 되는 단어가 필요하니 일단 그래야 한다. 다른 이유는 단어 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해 학생들은 일정 시간 책상 앞을 지키게 되고, 결과물인 시험지는 매 시간마다 차곡차곡 쌓여 보기 좋은 학습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으면, 초반 학습에서는 긍정적인 강화가 되어 선순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름다운 현상이랄까.


   이틀이 지나고 다시 만난 서준이는 첫 단어 시험을 치르며 덜덜 떨었다. 첫 시험 준비는 (당연히) 완벽하지 않았고, 채점 결과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진짜  외워지던 단어 맞았어요! 끝까지 풀었다니 신기해요.”

   “처음이라 힘들었지. 이렇게 외우는데, 얼마나 걸렸?”

   “8시간이요. 8시간. 얼마나 걸리는지 보려고 타이머 켜고 .”


   8시간이라니, 입이 떡 벌어졌다.

  무작정 앉아서 반복하다 보면 아는 단어도 다시 모르는 것 같고, 안 외워지는 건 영원히 못 외울 것 같은 기분에 사로 잡힌다. 요령 하나 없으니, 책상 앞에 앉아 용을 쓰며 준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준이도 나도 몇 개를 맞았는가 보다 시험지를 끝까지 풀어낸 사실이 기분 좋았다. 공부를 시작해 보겠다고 다짐은 했는데, 마땅한 방법을 몰랐으니 긴장한 채로 보낸 시간이었을 것이다. 공부 방법의 맞고 틀림을 말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버틴 시간은 그 자체로 서준이만의 온전한 첫 공부 경험이 되었고, 쌤인 내가 볼 때 첫 수업 준비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백 점을 맞기는 오히려 쉽다. 그날의 서준이가 결과와 상관없이 느낀 뿌듯함과 기대를 부르는 감탄이 경험하기에 훨씬 어려운 일이다. 서준이는 그 어려운 걸 첫 시간에 해낸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단어가 이런 거라면 저는  개씩은 못할  같아요."

  


   단어 암기, 처음에 5개만 외우면 어떨까.

너무 적은 숫자일까. 하루에 5개, 한 달 동안 꾸준하게 새 단어를 외워 나가면 (주말은 당연히 쉬고!) 한 달에 100개 정도의 단어를 익힐 수 있다. 일 년이면 1200개, 3년이 지나면 3600개다. 핵심은 꾸준히!, 그렇게 1년만 하면, 형태 변화 파생어 반대어 등의 연관 어휘를 다루는 센스가 생기고, 학령이 높아질수록 처리 속도가 빨라져 학생의 실제 어휘장 (word field)은 예상보다 훨씬 커진다.

  

   그렇다면 하루에 100개를 외우면?

한 달에 2천 개, 일 년에 1만 2천 개, 3년이 지나면!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단어의 신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 남아있다면 말이다. 질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단어 5개는 놀면서 외워도 까먹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꼽을만하니 어제의 단어도 떠올리고, 그제 외운 것도 충분히 기억해낼 수 있다. 혹시 오늘 단어를 놓쳤다면 내일이라도 꼭 해야지, 가벼운 새 다짐이 가능하다.

   하지만 백 개는 다르다. 어제의 단어는 그만두고라도 오늘 범위 내에서도 아침에 외운 단어를 저녁에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오늘 단어를 외우지 못했다면, 실은 하루쯤 단어를 건너뛰어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데, 그저 다음날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넌 기분이 든다. 놓쳐버린, 대단한, 한 번의 공부는 학생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출발은 만만한 편이 좋겠다.

단어를 외우는 일은 아마도 앞으로 내내 계속될 테니까.

적은 수로 단어 암기를 시작한 학생들은 암기 자체에 금방 익숙해지고, 금세 잘하고 싶어 한다. 단어량은 그때 늘려도 된다. 스스로 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을 인지하고, 유지하려는 의지가 피어나면 단어 암기가 습관이 될 수 있다. 

  꾸준함에서 비롯된 공부 에너지는 가속과 증폭의 힘을 짐작할 수 없다. 학생마다 다르고,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폭발한다는 사실이다. 한 번도 어김없던 일이다.

   


   단어 암기뿐 아니라 모든 암기는 지루하고 힘겹지만 어차피 계속해야 한다. 단어 시험은 영어 공부를 막 시작한 학생들을 기선 제압하는 수단이 아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학생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학습 방법이라는 것을 학생도 쌤들도 기억해야 한다. 걱정하는 것보다 무거운 부담이 아닐 수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름대로 계획한다. 주변인인 어른들은 이를 눈치챌 매의 눈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중3 서준이는 수업마다 30개의 단어를 외우기로 했다.

물론 서준이에게도 날마다 5개를 권했지만, 하루에 10개 일주일에 60개는 해보겠다고 했다. 적당했다. 서준이의 주도적인 태도가 남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제법 많은 학생들에게서 이런 순간을 본다. 한 학기 정도 그 속도와 학습량을 유지했고, 그러는 동안 같은 분량의 단어를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행히 2시간 남짓으로 줄었다. 하루 중 단어 암기에만 2시간을 쓴다면 지루하고 길게 여겨질 테지만, 8시간을 2시간으로 줄인 서준이에겐 가뿐했고, 오히려 그 경험 덕분으로 꾸준했다. 나는 서준이와 고3까지 수업을 했는데, 우리는 그 기간 동안 첫 교재인 중등 입문부터 기본, 실력 편과 고등 어휘 어원 편, 토플 보카까지 총 다섯 권의 단어 교재를 보았다. 각각 2 회독 이상 반복하였고. 

   서준이는 단어 암기가 습관이 되었다. 알려준 암기 요령 외에도 자기만의 기술이 생겼고, 다른 암기 과목을 공부하는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단어 암기는 별도의 과제이기보다 일상이 되었다. 두툼한 교재를 찢어지지 않게 접어드는 부수적인 노련함은 대학에서 전공서를 다루는 데도 기여를 했다고. 함께 수업하는 동안 단어를 외우지 못한 날도 (당연히) 있었고, 테스트 결과가 좋지 않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혼을 내거나 재시험을 치르거나 열 번씩 쓰거나 하지 않았다. 서준이에게 단어 암기는 그럴 일이 아니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잘하면 되었으니까.


“8시간이라니 너무 무식했던  같아요.”

쌤한테도 전설의 학생이야.”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우리 수다에 빠지지 않고 소환되는 첫 시간. 늦은 출발에 걱정의 말도 많이 들었지만, 서두르기보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에 정성을 들였다. 서준이의 노력은 스스로를 조금씩, 결국은 성큼성큼 나아가게 했다.


지켜볼 수 있어서 내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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