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발표하다
“축구 선수로 살아보고 싶어요.”
아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였고, 바로 다음은, ‘올 것이 왔구나!’였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분주하게 채우는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할 틈은 없었다. 아이는 태도는 사뭇 진지했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가볍지 않은 진심에 아무런 답이나 했다가는 후회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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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아이들, 그들의 꿈이 축구선수가 아닌 경우는 거의 없다. 등번호 7번이 새겨진 엉덩이 아래로 내려오던 유니폼이 제법 몸에 맞아가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던 스타킹이 짧아지며 무릎 언저리에 머물 때까지, 아이들은 날마다 축구선수가 되겠다 외치고, 자신의 맹세를 꼭꼭 씹어 먹으며 자란다.
나의 아이도 그랬다.
걷다가 뛰기 시작한 이후로 공차기(처음엔 공 굴리기였지만)를 멈춘 적이 없다. 학과 학원은 안 다녔지만, 방과 후든 클럽이든 시간만 맞으면 축구는 다녔다. 격월 잡지 포포투를 챙겨 읽으며 낯선 외국의 선수들을 알아가고, 벽 하나를 축구선수들 사진으로 채우고, 온갖 게임기로 다양한 축구 게임을 했다. 책가방을 집에 두고 간식으로 배를 채운 뒤,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즈음에야 꼬질꼬질해져 집으로 들어왔다. 아파서 며칠을 앓다가도 몰래 나가 공을 차고 들어오면, 그이와 나는 이제 다 나았나 보다 하며 한시름 놓기도 했다. 그맘때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이의 삶은 ‘축구’로 가득했다.
초등학생이니까, 초등학생인 동안에는 그리 두기로 했다. 공부는…… 미뤄 두었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일단은 실컷 놀아보라고. 아이는 친구들의 학원 시간을 꿰고 앉아 무리를 바꿔가며 놀았다. 너덜거리도록 찬 공이 여러 개였고, 아끼던 공 두어 개는 깜빡하고 두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뛰면서 하루를 보내고도 집으로 들어올 때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솔직히, 많이 놀긴 했지 내가.”
혹시라도 그 말을 들은 엄마가 그럼 이제 그만 놀라고 말할까 봐 이내 농담을 덧붙여 얼버무렸지만, 아이는 웃으며 인정했다. 이 녀석도 알긴 아는구나 싶어 다행이었고. 엄마들을 만나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밀려들던 불안과 덕분에 당겨하곤 했던 걱정들로부터 지켜낸 시간이었다. 인정할 만큼 놀았으니. 과거의 나를 칭찬했다. 그래, 공부야 차차 하면 될 일이니까.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학교 사정으로 일찌감치 치러져 중학교 배정 발표와 입학까지 꼬박 두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에 방학까지 했으니, 빈둥거림과 느긋함이 깃들기 전에 그간 미뤄둔 공부를 마침내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것이고, 아직은 그리 늦지 않은 때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순순히 문제집을 펼쳤고, 수학 학원을 다니며 중학생이 될 준비를 시작했다. 중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과 긴장이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듯 보였다.
그즈음 아이는 겨울의 아침임에도, 일찍 일어나 혼자 훈련을 한다며 나가서 공을 차고 들어왔다. 방학이라도 늦잠을 자지 않고 운동을 한다니, 내심 대견했다. 식탁에서 종종 초등학교 때 엘리트 선수 경험을 한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고, 자신에게 들어가는 교육비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오기도 했다. 소년인 아이가 무려 친구들 이야기를 해주니 반가웠고, 재정 상태를 물을 땐 이유가 궁금했다. 패드의 검색창이 ‘학생 선수’ ‘중학교 축구부’ ‘유스팀’ 같은 검색어들로 채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이가 잠든 밤이면 그이와 나란히 앉아 지레짐작만으로 대책회의를 하기도 했다. 다만 아직,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운동장의 귀여운 축구 선수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바빠지고, 축구에서 멀어진다. 영수학원으로 가던가 논술학원으로 가던가.
우리 아이는 여전히 취미반에서 공도 차고, 축구 캠프도 가고, 대회도 간간히 나갔으니 꽤 오래, 취미반 치고는 꽤 길게 버틴 편이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공부하면서, 주말엔 취미로 계속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그 정도면 적당하다 여겼다.
그런데 아이의 생각은 달랐다.
공을 차면서 많이 놀기는 했지만, 선수반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고, 아직 ’충분히‘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끝낼 수 없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 축구 선수‘가 꿈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어떤 일을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타고난 것‘도 아니고 선수하기엔 ’이미 늦은 것’도 알지만, 그래도 축구선수로 살아보고 싶다 했다. 천천히 이어지는 아이의 말은 고르고 고른 마음이었다. 떼쓰기가 아니라, 사춘기다운 퉁명스러운 말하기가 아니라, 나름으로 알아보고 생각하고 고민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진짜 마음의 목소리였다.
앳된 티를 털어내며 청소년으로 가고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려는 아이들은 어른의 눈에 서툴고 어설프고 아직도 귀엽게 보이지만, 치열하게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무시하고 다른 이야기들은 괜히 부풀려 들으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당사자인만큼 사뭇 진지하다. 나의 아이가 그 고민의 길에 서 있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지기도 하지. 엄마의 폭풍 잔소리를 각오한 대단한 용기를 내게 하니까. 하지만 진심은 스스로 단단히 설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엄마라도 달리 소용이 없고. 적어도 그 자리에서 나는 그걸 아는 엄마였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두 달, 세 번의 테스트를 받아보고 그다음을 결정하기로 했다.
아이를 존중하지만 선수로서의 삶은 바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꿈을 현실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 역시 아이와 다를 게 없는 입장이라는 걸 말했고, 축구 선수의 삶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바가 없으니 지금부터 같이 알아보며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무조건 안된다고 했으면 절대 포기 못했을 거예요. 테스트라도 받아보고, 전문가들이 아니라고 하면 그때는 마음을 접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는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많이 자란 아이였다. 역시 진심에는 긴 말이 필요 없었고, 나는 주로 듣기만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날의 대화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그나저나 테스트를 어찌 받는담. 어디 가서 나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건 아닌지…… 우리에게 엄청난 숙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