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꿈이 달려간 곳
돌아보면 아이는 언제나 달리는 중이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 아이는 셔틀에서 하차한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우리 집 현관까지 날마다 내달렸다. 운동화를 신은 날도 장화를 신은 날도. 나의 걸음 속도로 나란히 걸으며 사진도 찍고 하던 시절은 짧게 지나갔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퉁이에서 뿅 하고 나타나는 놀이를 즐길 만큼 아이는 점점 빨라지고 앞서 달렸다.
신기하게도 그때는 그렇게 달리는 것에 비해 잘 넘어지지 않았는데 어떤 어른들은 겁이 많아 그렇다고 했고, 그이와 나는 조심성이 많아 다행이라 생각하곤 했다.
부모라면 다들 같은 마음이겠지만, 난 아이가 아프고 다치는 게 세상에서 가장 겁났다. 아슬아슬하게만 보이는 아이의 뒤에서 그만! 하고 참 많이도 외쳤다. 집을 나서는 아이를 불러 세워 조심하라 주의주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엄마의 목소리로는 아이를 멈춰 세울 수 없다.
때론 나를 닮지 않은 역동적인 모습이 반갑기도 했다. 가벼운 몸, 쉬지 않는 다리, 한 번씩 돌아서 메롱을 하며 혀를 내밀고 깔깔 웃는 아이의 모습은 생기 그 자체였다. 겨우 다섯 살, 유치원 운동회에선 자진해서 햇살반 대표 이어달리기 주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체육 교과에 이어 달리기가 존재하던 열여덟까지 그 단어가 들리면 고개를 숙이기 바빴는데 말이다. 작은 운동장의 반바퀴를 힘차게 달리던 아이, 아이를 따라 달리며 감격에 겨워 촬영도 반의 반밖에 못한 나, 결승선에 들어온 아이를 안고 높이 들어주던 그이, 주변에 앉아있던 어른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다. 그 순간은 여전히 최고의 비타민이다. 남아이고, 주변 아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한창 노는 게 제일 신나는, 에너지가 분 단위로 채워지던 때였다.
보통 일곱 살 즈음부터 축구를 시작한다.
친한 아이들끼리 반을 만들거나, 빈자리에 맞춰 클럽에서 공을 차기 시작한다. 아이는 수영을 좀 다니다가, 초등학생이 되어 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기술보다는 협동을, 승부보다는 즐거움을 배우는 수업이었다. 첫 학기에 한 번, 다음 학기에는 주 2회로 늘렸다. 그러고도 학교 운동장에 늦게까지 남아 공을 차고 놀았다. 형들한테 싫은 소리도 듣고, 까불고는 도망을 다니면서도 어느새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2학년 때 아쉽게도 방과 후 축구반 추첨에서 떨어졌고, 다음 학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클럽을 다니기 시작했다. 유스팀에서 분리가 되었다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발생했고, 클럽 수업은 휴강과 합반을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운영되었다. 방과 후 운동 수업들은 모두 무기한 휴강에 들어갔다.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부모들이 더 많았고, 우리 역시 겁이 났지만 아이의 간절함에 일주일에 딱 하루 용기를 내어 운동장으로 향했다.
선수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소문을 들은 때부터 이미 마음으로는 선수반에서 뛰고 있었다. 당시 수업을 하던 코치와 상담을 했는데, 그는 ‘선수감인 아이들은 이미 통통 튀어 눈에 띄기 시작하고,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 보통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르다.‘ 며 우리 아이에게 선을 그었다. 저학년 선수반 모집이 시작되었는데 알리지 않았고, 기존 수업의 변동 스케줄도 전달하지 않았다. 코로나가 적당한 핑계였고, 우리는 결국 알아서 떨어져 나왔다. 사정을 다 모른 채, 선수반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는 상심했고, 그이와 나는 화가 많이 났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었다.
선수반, 너무나 낯선 세계였고 대단히 중요한 결정으로 여겨졌다. 너무 어린 게 아닐까, 소문으로만 듣던 극성 뒷바라지 할 수 있을까, 운동선수로 사는 삶은 너무 고단하지 않을까, 재능도 없다는데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르디 이른 걱정이었다. 아이가 즐거워하고, 하고 싶어 한다면 그 이유만으로 가볍게 시작해 보아도 되었는데, 세상 진지했다. 마치 아홉 살 선수 아흔 살까지 갈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꿈을 향해 달리는 신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수반이라고 으스대기도 하고 헛발질을 하더라도 폼을 잡으면서 말이다. 어리고 작은 내 아이의 꿈, 그저 너무 하고 싶던 축구선수처럼 운동장을 달리며 비장할 필요 없이 어린이에게 어울리는 딱 그만큼의 크기로 도전해 보면 되었을 일인데, 못내 아쉽다. 타고난 유연성과 통통 튀는 재능이 없으면 어떤가. 공 한 번 뻥 차고 세상 둘도 없을 뿌듯한 경기를 마친 날, 그대로 쓰러져 잠든다면 쑥쑥 잘 자랐을 것이다.
겨우 열 살인 아이를 두고 너무 쉽게 판단했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치사하게.
재능이 있다면 더 잘하겠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손흥민을 보고 꿈을 키우기 시작한 모두가 손흥민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린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코치와 한 사람의 말을 너무 크게 들었던 서툰 부모가 지난 그 시간에 있다. 두고두고 아쉽다.
아이는 4학년이 되었고 코로나가 잦아들며 놀이터와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는 시간이 늘었다. 집 근처 클럽의 주말 축구반에 들어갔고 방과 후 수업도 다시 시작했다. 외부 친선 경기도 참여하고, 다른 팀과 어울려 축구 캠프도 다녀왔다. 축구는 취미이자 특기가 되었고 아이는 내내 공을 차며 살았다.
이제는 아파트 정문에서 집에까지 내달리기보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천천히 걷는 청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느려지지도 흐려지지도 않았나 보다. 축구선수로 살고 싶던 아홉 살의 꿈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나 보다. 고여있던 마음이 터져 나왔나 보다.
이번엔 누가 뭐라든 그 마음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