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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주 NJ Namju Lee Sep 15. 2019

유학을 결정한 이유

NJ Story 01

2018년 10월 어느 오후, 아는 형님의 소개로 어떤 후배를 만났어요, 20대 초반의 그 후배는 미래에 대한 생각, 예를 들면 취직, 유학, 등등 고민이 많더라고요. 그 친구가 저의 백그라운드를 어느 정도 알고 소개를 받은 터라, 대략 대화는 이러했어요.


후배 - "형, 춤추셨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프로댄서였다는데, 그렇게 춤추고, 다니면서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나    - "사실 공부 안 했어요. ㅜ, 그래서 유학 결정하고 나서, 말도 안 되게 고생했어요... 이미 시작한 거 돌릴 수 도 없었죠... 진퇴양난 상황에서 버티다, 운 좋게 풀린 케이스죠
후배 - "그러면, 춤추다가 갑자기 유학 결정하신 거예요?"
나    - "아니요, 사실 춤추다가 일을 했는데, 열심히 해도 답이 안 나오고, 사실 한국을 떠나려고 했었죠. 근데 그거 아세요? 사람이 지칠 때는, 일이 힘들어 지치는 것보다, 답이 안 나오는 일을 할 때 지쳐요..."
후배 - "그럼 유학을 결정한 이유가 뭐예요?"
나   - "조금 장황할 수 있는데, 이야기해볼게요, 제가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리스크가 큰 도전을 했냐면...."

"형은 왜 유학을 결정한 이유가 뭐예요?"


제가 유학을 결정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저에 대한 배경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저의 커리어 혹은 경력은 사실 좀 많이 꼬여있어요, 일반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실무를 하고 그렇게 경력을 쌓아가는 게, 조금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적이죠. 반대로, 저는 어떤 의미로는, 남들 공부할 때, 일하고 남들이 일 할 때, 공부한 케이스이긴 해요. 미국에서도 연구자로 일을 먼저 하고 그다음 학교를 갔죠...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연구원이 되는 게 상식이긴 하죠.


맹모삼천지교 많이 들어보셨죠? 대략 내용이 이러하죠,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고, 어린 맹자가 장사 지내는 것을 자주 보고 그 흉내를 내자, 맹자 어머니는 이사를 시장 근처로 갔죠, 이번에는 맹자는 거리에서 물건 파는 것을 보고는, 그 흉내를 내자 맹자 어머니는 서당이 있는 곳으로 집을 옮기고서야 여기서 맹자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고 해요.

개인적으로 이 해석은 굉장히 표면적인 해석이라 생각이 되고, 제가 동의하는 해석은 다음과 같아요.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가까이 살았는데, 거기서 맹자는, 인생과 삶에 대한 경험했을 것이고, 집을 시장 근처로 옮겼을 때에는, 세상의 논리, 인간의 대한 이해를 하고, 서당 있는 곳으로 집을 옮기고, 여기서 맹자 삶과, 세상 논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을 습득했다는 흐름인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후자의 이해가 저의 인생설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일대 일로 갖다 붙이기에는, 억지가 있어 보이지만, 저는 중학교 때부터 알바를 하면서, 그 후에 공부할 때 무엇보다 동기부여가 강하게 됐다는 점, 즉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비슷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죠.


여하튼, 중 고등학교 남들은 공부할 때, 저는 춤추고 다니고, 그때, 2001년도 때, HOT, 젝스키스, 핑클 등 유명 기획사 사장님들과 가수들을 보면서, 돈의 힘에 대해서 많이 느꼈죠.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복학을 하고, 학업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먼저 시작했죠. 왜냐면, 저희 같은 흙수저도 못 되는 "ㅎ" 들은 돈이 없으면 당장 버스도 못 타고 라면도 못 먹으니까요.


그렇게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대학 3학년 때 자그마한 스타트업을 하나 시작했죠. 무슨 일이냐면, 그렇게 대단한 사업은 아니고, 건축디자인을 하다 보면, 시각화 작업을 하거든요, 가령 이렇게 설계가 된 일들은 이렇게 지어질 수 있다.라고 시각적으로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죠. 건축주들은 건축 도면에 대한 이해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지어질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거죠. 즉, 3차원 그래픽으로 디자인을 해서 보여주는 작업들이죠.


저는 공업고등학교에서 건축설계 디자인을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앞으로 다가올 기술들을 접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대학에서도 남들보다는 조금은 다른 방법론으로 설계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 시각화 일을 받아서 하게 된 거죠. 사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과 많이 다투었죠, 내가 흥미를 느끼고 배우고 싶은 부분을 강화하기보다, 학교에서 요구사항에 체크마크를 채우는데 것과 부딪혔고, 잡음이 많이 일어났죠. 그래서 결국 졸업 작품은, 컴퓨터를 쓰지 못하고, 손으로 모든 것을 다 그려서 내야 했죠.


사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시각화 작업을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전문적인 직업이었어요. 그래서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많지 않던 저에게, 비교적 많은 기회가 주어졌죠. 그때 미리 사업을 하시는 선배 형들의 도움을 받아서 스타트업을 시작을 했죠. 사실 앞의 사건 하나하나가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되는데, 나중에 차차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요.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왜 유학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좀 더 시각을 고정시키고 이야기를 드릴게요.


만약에 그때, 내가 잘 되지 않았으면?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았을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갈림길 같은데, 저의 개인 디자인 회사 NJSTUDIO를 2004년 겨울에 시작을 하면서, 아무래도 희소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다 보니, 많은 기회를 가졌어요. 사실 그게 저의 독특한 인생의 시작이죠. 힘들 때마다 가끔, 만약 내가 그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좀 편하게,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하죠, 그 시점으로 제 인생이 확 바뀌었으니까요.


회사가 나름 잘 됐어요. 어떤 하나의 아이디어 혹은 제품을 대량 생산해서 이윤을 남기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보니, 매번 가내수공업으로 일을 한 땀 한 땀 처리해야 하는 맹점은 있었지만, 나름 잘됐어요. Autodesk라고, 마치, 반도 체계의 삼성 같은 회사인데요, 즉 설계 툴을 만드는 외국계 기업에서도 초청되어서 서울 대구 세미나도 하고 대외 활동도 왕성하게 했죠. 운이 좋았어요. 그 세미나 후 많은 일들이 들어오고, 작은 일을 하는 회사지만 26살 저에게는 나의 지식과 경험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던 거죠.


또 다른 어떤 분기점 한번 맞았는데, 2007년도 런던을 다녀온 후, 회사가 커질 수 있는 지점을 맞이했죠. 고민했죠. 직원을 확 늘려서 돈을 더 벌 것인가? 아니면 소수 정예로 벌 수 있는 만큼 벌고, 그 시간에 미래를 대비하겠는가? 이런 거죠, 직원 10명으로 10억을 벌 것인가? 1명으로 1억을 벌고 나머지 시간을, 영업을 하거나 수금을 하는 시간을 줄이고, 남는 시간을 계속 발전하는 산업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할 것인가. 즉 회사에 투자할 것인가?, 나에게 투자할 것인가? 결국 후자를 선택하였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아요.


한국이니까... 한국에서는....


1) 노력하고 실력을 높여도, '을'은 그냥 '을'이다.

저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저는 저의 열등함을 잘 알고 있기에,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정신승리보다는,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것 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죠. 이건 춤출 때 배운 점이죠! 흔히 말하는 흙수저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한국사회에서 흙이 아닌, 동수저 혹은 은수저까지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했죠. 조선 시대 신분제처럼 그냥 흙수저는 흙수저 다라는 거죠. 가령, 하청의 하청일이라도 열심히 하면, 내가 좀 더 나은 미래를 나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착각을 한 거죠. 그냥 정해진 틀 안에서 부속품이 되길 원하는 거죠. 제가 해외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데,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어요. 위에서 찍어 내리거나, 방해하거나 혹은 뒤에서 정치하는 부분들이 비교적 상식선에서 일어나죠. 물론 예외는 항상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해요.


2) 노력해서 한 분야의 최고의 자리를 간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는 게 없다.

최고의 노력을 해서 최고의 자리에 가면,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착각을 한 거죠.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면, 그냥 기득권자, 제가 하는 일의 사업적 측면에서, 부려먹기 좋은 20대 청년 정도인 거죠. 서로 돕고 내가 열심히 해주면, 서로 잘될 수 있을 거야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한 거죠. 제가 경험한 해외는, 인정을 해주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죠.


3) 일을 시켜 놓고, 왜 돈을 안 주시죠?...

제가 3년을 돈을 받으려고 따라다닌 배 XX라는 사람이 있어요. 나중에 알게 됐죠. 그때 같이 일하시던 분이 시간이 흘러 이야기해주신 건데, 미리 처음부터 기획하고 압류를 잡힐 것은 계산하고 움직이셨더라고요. 이런 악덕 사업 군들이 종종 있죠. 사실 대한민국 법이 이런 것을 잘 이용해야 사업을 잘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제가 시드니 있을 때, 일을 하고 돈을 못 받을 상황에 처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제가 법적으로 최선을 다해 대응할 거라 하니 , "나는 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라는 말과 함께 바로 입금이 된 적이 있어요. 제가 경험한 시드니 런던 미국은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걸리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들이에요. 그러나 한국은 법을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는 기득권들에게 더 관대한 건 사실이죠.


4) 실력보다, 감투?!

"내가 너 키워줄게, 내 밑으로 와!",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죠.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공감하실 것 같아요. 나는 너를 도울 수 있으니, 나를 도와 함께 해보자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즉 장미 빛 미래를 강조하며 이거면 돼, 너는 학위도 없고, 사회적 위치가 이러한데,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는 위치야, 그러니, 나와 함께 하면, 내가 너를 잘 챙겨줄게! 뭐 이런 거죠. 물론, 결과적으로 제가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믿음과 도움을 주신 좋은 분도 계시지만, 사회적 감투를 이용해서 그들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음을 부정하진 않으실 거예요. 이와 같은 사례는, 제가 해외에서 한국인 교포들에게도 당했던 거죠.


요즘은, 열정 페이라고 말하던데, 그때 저는, 열심히 봉사 활동하면서 이용당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결정을 했죠. 사회가 이렇다고 해서,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냥 열심히 달리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죠.

절이 떠날 수 없죠, 중이 떠나야지


결과적으로, 저는 20대 때, 나름대로 굉장히 열심히 한 이유가, "위로 올라가면 더 나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누구보다도 열심히 보내면서, 나는 여기까지 그래도 올라왔는데, 내 경험과 기술은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판단되는데, 나한테 주어지는 환경은 너무나도 똑같은 거예요. 오히려 경계하고, 소수지만 불행을 가도하는 무리도 있었죠. “거봐 그러 길래,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


그러던 와중에, 건축 컴퓨팅에 관심이 많은 교수님의 컴퓨터 프로그램 개인과외를 해드리고 있었는데,


교수님 - "너 나이가 어떻게 되니?"
나        - "26살입니다."
교수님 - "네 나이 때는, 머릿속의 지식을 빼서 남들에게 줄 때가 아니라, 주어 담을 때고, 그리고 더 나이 들어 그 지식을 돈이랑 바꾸는 거야, 지금은 너무 이르다."
나         - "아... 네... (하지만 일단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죠....)"
교수님 - "너 같은 애들이 유학 가면 잘할 거야. 유학 가라!"


과외가 끝난 후, 지하철역으로 가던 길에, PC방이 보여,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대학교와 회사 사이트들을 들어갔죠, 제가 하고 있는, 하고 싶은 작업들이 많이 있었어요.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물론 영어를 하나도 못했기 때문에 그림만 보다가 나왔죠. 교수님께서는 3개월 영어시험 보고 3개월 포트폴리오 준비해서 올해 가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 그 교수님께서 저에게 많이 미안해하셨더라고요. 왜냐면,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저한테, 괜히 바람 넣어서 영어공부에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미안했다고, 나중에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공부해야 할 동기가 부여된 거죠


이미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것에 충분한 염증을 느끼던 터라,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거라는..... 여하튼, 한국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한번 사는 인생, 도전해 볼 것인가라는 고민을 했죠.


동시에, 가장 좋은 투자는 교육 같아요, 흙수저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장 쉽고 완벽하고 리스크가 적은 투자인 건 매일 깨닫는 부분이죠. 여기서의 교육은, 학원을 다닌다. 던가 좋은 학교를 간다던가 하는 자격증을 취득한다. 던가 등등의 차원을 넘어, 다른 동물과 차별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수정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상을 해봤죠, 만약 내가 유학을 가고 실무 경력을, 해외에서 쌓게 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게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지 않을까? 그냥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불만족스러운 사회생활이 될 텐데,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죠.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가능하기에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상대적으로 책임질 것도 많지 않고, 그냥 스스로 타협하고 넘어가기에는 27살의 저는 너무 젊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솔직한 심정에, 일당 받으면서 하루하루 사는 나의 미래가 답답했죠. 뭔가 게임 체인저가 절실했었죠. 제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해병대의 전투력이 남아있기에, 도전해보자고 생각했죠. 유학을 가자, 유학을 가서 취직도 하고, 내가 더 자라나면 그때는, 한국 구조와 문화를 고려해 본다면,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더 자유롭게 하고, 나의 감투와 경력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결과적으로, 이 사건 이후로, 저는 2007년 봄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하여, 2017년도에 상을 타며, 하버드를 졸업했어요. 그 과정으로는 시드니를 거쳐 보스턴 뉴욕 센프란을 오가며 MIT, UC버클리에서 연구원과 학위과정도 마쳤고요. 특별히 영어공부는, 솔직하게 글을 쓰는 입장으로서, 토플시험을 25번 넘게 봤죠. GRE라고 미국 대학원 시험도 1번 보고 5년이라는 기간이 만료되어 1번 더 봤고요. 아마도 한국에 큰 영어학원들의 몇몇의 강의실 칠판과 문짝은 제 돈으로 했을 거예요.


금전적으로는, 아이비리그 유학을 한다면, 일반적으로 1년에 대충 8천에서 1억 정도 잡습니다. 그런데, 저는 절반도 안 되는 4천 정도로 1년을 버텼죠. 정말 말도 안 되게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지만, 노력에 비래 하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믿기에 버틸만했죠. 적어도 한국에서의 처우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이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이 가장 힘들 때다..."를 대뇌이면서 버텼죠.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공부와 작업에 쏟아 냈죠.


잘 아시다시피, 유학을 가고, 해외 경력을 쌓는다고 해서 흙수저의 삶이 확 변화하지 않겠죠. 그냥 똑똑하고, 경험 많은 노동자일 뿐이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상에는 좀 더 넓은 시장과, 좀 더 공평한 기회가 많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죠. 흙수저의 "ㅎ" 도 안 되는 우리들에겐, 판 자체가 바뀌는 거죠. 세상은 넓기에, 나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며, 우대해줄 수 있는 판, 즉 다른 세상으로 가면 되는 거죠.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제가 왜 유학을 결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기회와 결과에 대한 부당함. 절이 떠나랴? 중이 떠나랴?

그냥 너는 그 자리에 그냥 있어. 너의 노력과 상관없이, 백과, 학벌, 그리고 돈 없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말도 안 돼 는 운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그냥 너는, 현대의 봉건사회에서 그냥 거기 있어.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도 괜찮아요. 그거에 대한 합당한 대우가 있으면, 일하고도 돈도 못 받고, 법적으로 아무 보호도 못 받는(물론 법을 잘 이용하시는 분들 제외), 이 한국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두 번째, 감투 말고 실력!

재미있게 즐기며 일하고 싶었죠. 감투로 학벌로 그럴싸한 실적으로 위에서 누르는 상황들을 보면, 솔직히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내가 아이비리그에서 공부했어.", "내가 해외에서 일을 하고 왔어"라고 하면, 그런 경험들이 주는 백그라운드 사실 무시 못 하잖아요. 그게 심한 게 한국사회이고, 사실 제가 해외에서도 10여 년 정도 살고 있는데, 학벌에 잘 안 속아요. 학벌은 학벌이고 실력은 다른 이야기니까요. 여하튼, 만약에 이것들이 학위와 경력이 받쳐줘서 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른 부당한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다면, 더 확실히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죠. 일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하고 싶었어요. 내가 즐겁게 나의 실력을 올리는데 집중할 수 있으면 일하는 것도 재미있기 때문이죠. 다른 정치적 요소 혹은 나를 거치래 포장하는데 쏟는 에너지 말고.


셋째, 저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한 편인데, 그렇게 사는 게 싫었죠.

유학 결정을 내릴 때와, 그 준비 중에 힘들 때, 항상 스스로 하는 말이, "너 다시 옛날로 돌아갈래?"라는, 짧지만 저에게는 아주 강력한 말이었어요. 이 생각을 하면 정신이 바짝 들죠! 짧지만, 정말 다이내믹하게 살아온 제가 느낀 인생은, 하나의 소풍? 하나의 게임 정도인 거 같아요. 해 보고 안 되더라도 얻는 게 분명히 있고, 또 안 되더라도 다른 길이 생기더라고요. 평행우주론에 보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면, 그에 따른 우주가 열린다. 고하죠. 만약 내가 유학을 선택했다면, 그 새로 열린 우주에 사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많이 했죠. 분명 지금 한국의 사는 나보다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도전하며 사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더라고요.


요약하면


내가 경험한 한국사회 답이 없다. 불평, 불만, 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핑계되며, 정신승리 말고, 내 인생을 기득권이 만든 구조, 혹은 남들의 시선에 맡기지 말고, 나의 인생을 살! 자! 쉽지 않죠? 힘들죠? 그러면 끝나나요? 어떤 미래를 원하세요? 그에 맞는 결정을 내리고, 그 선택에 따른 인생 수업료를 내고, 피하지 말고, 스스로의 하루하루를 사세요, 그러면 그 미래는 현실로 다가오죠.


앞서 맹모삼천지교의 프레임으로, 저는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 안에서 사회가 어떻게 도는지를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이해했고, 따라서 젊기에, 리스크가 큰 도전이 가능했고, 리스크가 큰 만큼 그 반대급부도 컸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학교나 어른들에게 배운 논리대로 세상은 안 돌아가거든요. 호구되기 쉽죠. 사실 모든 경험이 가치가 있는데, 호구가 됨으로써 어떻게 하면 미래의 호구가 안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는 거죠.


동시에,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사회의 구조 안에서 존재할 때의 안정감, 그 안정감이 나를 어떤 의미에서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고, 내 안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시작함으로써 발견됐다고 생각돼요. 얼마나 나의 경험이, 그 후배에게 울림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인생의 마라톤에서 도움이 되는 이야기길 바래요.


나   - "사실 잘 모르겠어요, 누구나 자신만의 확신과 동기와 이유가 있을 텐데, 저의 경우를 회상해 보면, 뭔가 특별하다기보다는, 가진 것들에서 최선을 다한 것 같고, 사회의 염증을 통해, 내가 원하는 목표를 잡고 포기 안 하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목표가 확실하면, 누가 말려도 하는 것 같아요."
나  -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동기부여를 할 때, 두 가지가 있는데 (1)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 (2) 부정적 강화(native reinforcement) 가있어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풀어서 설명해드릴 건데, 저는 스스로에게 이 두 가지로 방법으로 자극했던 것 같아요. 즉 (1) 해외에서의 나의 밝은 미래, (2) 내가 경험한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면 "
후배 - "형, 하버드 다니실 때, 총장한테 메일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예요?"
나  - "아, 그 이야기요?  그것도 좀 긴 이야기인데, 나중에 제가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Revision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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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 공고생 흙수저의, 하버드 졸업, (이) 억대 연봉 그리고 서바이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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