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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BOYOUNG Apr 23. 2024

봄날의 달리기를 해본 적 있으세요?

  봄날의 달리기를 해본 적 있으세요?



  마라톤 참가 신청을 한 뒤에 생각해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달려본 적이 언제더라? 버스를 타기 위해서 뛰었을 때? 그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뜀박질에 가깝다. 놓치면 지각을 한다. 안 된다. 다음 달 카드 값은 내야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마지막 달리기는 이렇다.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헐떡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뛴 적이 있는가. 있긴 있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에서. 근데 선뜻 순수라는 말을 덧붙이긴 어렵다. 대개 우리는 러닝머신을 탄다고 하지, 러닝머신을 달린다고 하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러닝머신은 목적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할 뿐이라는 것. 이는 말(馬)을 탄다와 같다. 말을 타고 달린다. 러닝머신을 타고 달린다.


  ‘왜?’


  지각하지 않을, 카드 값을 마련하기 위한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나의 달리기에는 늘 목적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내가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달려본 적이 언제더라?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마라톤 신청을 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이라는 건 출발의 목적이 없고 순수하게 시작되어진다. 빨리 달릴 순 없을까? 인간의 호기심은 인간을 빠르게 질주할 있게 했으며, 심지어 하늘을 날게도 했다. 만약 지구의 생물을 육체적 능력에 따라서 피라미드로 위계 짓는다면, 과연 인간은 몇 번째에 위치해 있을까? 중간만 해도 대단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을 지닌 인간의 호기심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근접할 수 있게 한 요인 중 하나이니 말이다.(물론, 자연을 발아래 둔 지배의 논리에서 보면, 인간 지성이 가진 혐의는 자유로울 순 없지만.)


  아니 그러니까, 호기심에서 출발한 마라톤 신청이 대단하다는 거냐? 그건 아니고. 정말 단순한 호기심에서 신청했다. 사후적으로 의미화 해보자면,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 색다른 이벤트의 의미로 신청하게 되었다.(42.195km가 아니라 5km이지만.)


  사실 신청을 하고나서 크게 실감나진 않았다. 그런데 택배로 마라톤 유니폼과 번호표를 미리 받았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5km일지라도, 제대로 뛴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 걱정만 하다가 마라톤 당일이 되었다.


  공설운동장에 도착해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는 좀 놀랐다. 이른 주말 아침부터 이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니! 그리고 몇 천의 사람들이 다 같이 입고 나온 유니폼 때문이었다. 대회 유니폼 색은 진달래 비슷한 색이었는데, 집에서 봤을 땐 촌스러웠다. 핫핑크라기엔 좀 그렇고 핫분홍(?)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런데 군집하고 보니 산뜻한 4월의 햇살과 정말 잘 어울렸다. 가족, 친구, 연인, 동호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사진을 찍고 준비 운동을 했다. 알 수 없는 어떤 에너지가 샘솟은 나는 헛둘헛둘 구령에 맞춰서 준비 운동을 했다.


  대회의 코스는 세 개였다. 하프코스, 10km, 5km. 하프코스부터 출발하고 차례로 10km 코스 신청자들이 뛰었다. 그리고 5km 차례가 되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하늘을 향해 연막탄이 날아올랐다. 펑! 색색의 연기가 하늘에 흩날렸다. 봄날의 하늘은 푸르렀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 번 더 어떤 에너지가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인원이 많아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공설운동장을 빠져나왔을 때, 서서히 속도를 높여 뛰었다. 본격적인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헉헉. 숨은 금방 차올라서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뛰었으나, 차는 숨을 진정할 수 없었다. 가득 차오른 숨이 헉헉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까 굳이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냐.’ ‘알람도 안 맞추고 단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 아침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 ‘지금도 늦지 않았어. 멈춰도 돼.’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멈춰지지 않았다. 핫분홍 무리 안에서 발산되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나를 계속 뛰게 했다. 나는 하나의 물결처럼 핫분홍의 물살이 되었고, 빠르진 않아도 계속 달렸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핫분홍 에너지에 기가 눌려 있던 숨이 다급히 말을 걸어왔다. ‘더, 더는... 무리야!’ 나는 타협을 시작했다. ‘마, 맞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 순간이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파이팅이라고 외쳐주며 응원을 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다. 멈출 수 없었다. 힘들지만, 그 순간 나는 내 숨을 초과한 힘을 얻었다. 달리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풍경이 낯선 풍경이 보였다.


  평소에 내가 뛰던 자리는 보행로였다. 도로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속도의 공간이었다. 침범했다가는 인간의 호기심이 낳은 자동차에 치이는 수가 있으니, 내 걸음의 위치는 늘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화면에 가닿았다. ○○○번 버스 몇 분 후 도착. 그것은 보이지 않는 화살표였다. 나는 그것에 따라서 뛰었다. 후다닥! 버스가 왔고 그것을 타고 도로를 달렸다. 달리면서 나의 시선은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의 집약체인 스마트폰에 고정되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길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반복되는 걸음은, 어쩌면 내가 누군가의 게임 속 NPC*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NPC : Non-Player Character의 줄임말. 플레이어가 직접 움직일 수 없고, 게임 마스터가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부르는 말. 퀘스트 제공이나 스토리 진행 등의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도로 위를 뛰고 있다. 교통이 통제된 뻥 뚫린 도로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푸릇한 녹음이 채색된 가로수, 편의점 외에는 문을 닫은 상점들. 자유로운 느낌이 샘솟았다. 도로를 점유(?)하면서 느낀 이 느낌은, 도로를 지배한 것 같아서가 아니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서 버스를 타지 않고, 핫분홍의 물결 안에서 온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내가 NPC가 아니었구나.’


  생존 게임에서 뛰던 뜀박질에서 벗어나서, 있음 그 자체를 체감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나의 위치를 바꿔보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사유를 기분을 선사했다. 물론 신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고 나는 조금 들떴다. 구름 위를 뛰는 기분이 이런 걸까?


  ‘힘든데, 근데 안 힘들어.’


  불가능한데 가능할 것 같은,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게 되는 믿음이 눈부신 봄볕 아래에서 솟아났다. 늘 어떤 목적을 향해 뛰기에 급급했던 나는 어느새, 경쾌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함께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달려본 적이 언제인가요? 봄날의 달리기를 해본 적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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