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떻게 슬퍼할지 알기
추도의 법도를 다시 성찰해야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19기를 지났다. 공교롭게도 2월 18일 바로 전날까지 나는 3박4일 대구에 출장을 갔었다. 대구 지하철은 부산이나 서울보다 깨끗한 인상이다.
한때 온라인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비하하고 욕보이는 억지 유행어가 퍼져나간 적이 있었다. 그 반대편에선 그 미러링의 일환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또다른 억지 유행어를 밀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명한 광주시와 호남 시민들은 미러링 행위에 대부분 동참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런 유행어들은 시간이 지나자 사그라 들었다.
대구 참사와 비슷한 시기 효순이 미선이 참사 당시 울려 퍼진 반미 유행가도 기억이 난다. 당시 선생님은 우리 반 장기자랑 영상을 만들며 마지막에 그 노래, "Fucking USA"를 모두 다 함께 합창하는 파트를 넣었다.
분노감과 반마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희생자들의 사진을 공공연한 장소에 게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명목은 미 제국주의의 만행을 똑똑히 보자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징그러운 사진을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을 테다.
세월호 참사 이후 2년 반 정도 시간이 흘렀을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회장 선거를 진행했다. 3번 후보는 회장과 부회장 모두 무용학과였는데, 선거 유세기간 동안 교문 앞에서 7시간 추모 무용을 치렀다. 그들 나름 추도의 의식이었겠지.
당시 인문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연구원 선생님 한 분이 "7시간 동안 얼마나 추웠을꼬"하며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든 지금이든. 당시는 세월호 참사 몇 주기라거나, 딱히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던 시점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 본인들 선거가 있었을 뿐이었지. 수 백명이 죽은 비극을 자신의 학생회장 선거에 이미지 포장용으로 이용하다니, 그게 무슨 짓인지 화만 났다. 그들은 학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교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혀를 차는 소리만 들려왔다.
직장을 구하고 상경했을 무렵, 역 한 켠에서 "박근혜가 세월호에 가스를 주입해 학생들을 죽였다!"며 피켓을 들고 행인에게 소리를 지르는 중년 여성을 보았다. 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그냥, 현실이 자신이 쌓아온 분노의 무게를 충분히 받아주질 못하니 현실을 더욱 나쁘게 만들어서라도 그 분노 풀이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말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느껴질지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말하고 싶다. 우리 이제 추모의 법도를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자고 말이다.
죽음이 가장 강렬한 경험이고, 가장 감정을 강하게 지배하는 경험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죽음을 욕보일 때 왠만한 비하 발언보다 훨씬 더 강렬한 효과를 안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게 그 중 하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꾸만 죽음에 잇따르는 슬픔과 분노에 다른 욕망을 담으려고 하는 게 또 하나의 큰 문제다.
"더욱 슬퍼해, 울부짖고, 더욱 분노해. 저 나쁜 사람들의 죄상이 밝혀질거야, 음모만 사라진다면. 그 동안 우리가 위로해줄게, 우리만 바라봐."
그리고 현실이 그 분노의 무게를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대단치 않거나, 일각에서 불지핀 음모론이 썩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못한다면 미심쩍은 태도를 견지한 채로 모든 게 잊히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질 때마다 나는 그런 인상을 받는다. 사회가 슬픔을 슬픔대로 대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는 인상 말이다.
어쨌든 센세이셔널한 소식에 사람들의 감정은 격렬하게 끓어 오른다. 그것은 어떤 감정일까. 그 감정이 흥미 위주의 호사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면 가장 나쁜 일이겠지만, 왠만해선 커다란 비극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슬픔과 분노를 연결짓고, 그 분노에 자신의 욕망이든,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욕망이든 투사하려는 모습은 종종 보인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대중적인 감정으로 올라서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음모가 있을 수야 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은 담담히 슬픔을 슬픔 그 자체로 수용하는 것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추도하자. 가까운 사람을 잃고 고통과 비탄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자.
다만 가슴 속 슬픔이 안겨주는 어떤 계시와 같은 깨달음에 너무 섣불리 이끌려 가면 안 된다. 그리고 분명한 증거가 없는 음모론을 격한 감정 속에서 너무 섣불리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의 직관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친구다.
무엇보다도 슬픔을 과시용으로 소비해서도 안 된다. 난 가급적이면 함께 추도해주는 게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띄는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질책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추모 방식은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은 왜 다시하게 되는가,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답은 종교의 쇠락이다. 아마 종교가 가진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커다란 역할이 죽음에 대한 애도와 추도였다. 종교는 슬픔을 그 자체로 슬퍼하되 적절한 법도에 따라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해준다. 슬픔의 기간을 명료하게 종결짓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제는 종교의 그런 역할마저 확신하지 못하는 때가 되었다. 이념이 거칠게, 그리고 서툴게 그 빈 자리를 메우려다 이런 사달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싶다. 슬픔과 분노는 어느 시점에 끝매듭을 지어야 할 지 알지 못하는데 분노의 방향을 잡고 목적의식에 맞게 변용시켜야 할 욕망만 들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