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셨던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이고 할아버지가 드넓은 논을 가진 지주여서 피난을 와야 했다며 "그 땅만 되찾으면 너희들 한평생 놀고먹을 텐데" 꿈같은 소리를 하시면서 쌀밥을 퍼주곤 하셨다.
이밥은 쌀밥의 경상도 사투리며 조선시대 쌀밥은 서민들이 감히 먹을 수 없는 귀한 밥이어서 이李 씨들의 밥이라는 이 밥이 되었다고도 하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이 밥이라 말한다.
재미교포 작가라 기대도 되고, 늦었지만 한국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간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었다. 그러나 절반을 읽다 덮어 버렸다. 요즘 윌리엄 트레버를 읽어서 그런지 눈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번역서라 그래서 그런지 어색한 표현도 많고, 사투리 번역은 의아했다, 난 영어도사가 아닌데도 거꾸로 영어 원문의 단어가 보였다. "주제. 구성. 문체" 소설의 삼요소뿐 아니라 한국작가의 기준에서 보면 많이 모자라 보인다. 그래도 스토리가 아쉬워 너튜브 신께 기도해 드라마 요약본을 얻었다. 책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역시 재미없다. 조금은 허탈하고 아쉽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한국인이 영어로 쓴 소설을 번역해서 읽게 되었나 가슴이 아프다. 국내에 재능 있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브런치에만 들어와도 빛나는 글이 얼마나 많은데...
장사꾼들, 정말...
각설하고 드라마에서 집 떠나는 주인공 선자가 어렵게 얻은 쌀로 지은 하얀 이밥을 눈물로 먹는 장면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도 내가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 기숙사로 집 떠나던 새벽, 이밥을 지어주셨다. 대학입시를 치는 날도 아침부터 밥 먹는다고 불평했던 것이 미안해서 그날은 숙연하게 한 그릇 밥을 다 비웠고, 어머니는 옅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세월을 REW로 맞추어 우리 아들이 처음 우리 품을 떠나 대학 기숙사로 가던 날, 우리도 어머니처럼 이밥을 지어 먹였다. 미국애들 가득한 기숙사에 아들을 짐과함께 밀어 넣고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때,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하얀 밥을 지어 먹여 나를 떠나보내던 그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 찌질이도 못났지, 왜 우리는 있을 때 그러고 없을 때 그럴까.
요즘은 시간만 나면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영상을 돌린다.
갑자기이밥같이 하얀 설산,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어졌다.
황정민이 주연한 영화 히말라야를 다시 보았다. 개봉당시 별 감흥 없이 보았는데 관심을 갖고 다시 보니 실화라서 그런지 감동적이다. 아니 황정민과 정우가 연기를 너무 잘한다. 글쓰기에서 "문체"가 영화의 연기자 같은 것일 텐데 그 감초 같음이 부러웠다. 정상에 서기 위해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탐험정신-험지를 탐구하는- 을 느꼈다. 그들은 정상을 공격하는 동안 하루이상 굶는다. 아니 베이스캠프부터 그렇게 몸에 안 좋다는 라면, 햄을 좋다고 우걱우걱 먹는다. 고도라서 밥이 잘 안 익으니 압력밥솥으로 음식을 만든다. 정우가 연기한 박무택 대원에게 하얀 이밥을먹여 보냈더라면 좀 덜 아쉬울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의 동사한 몰골을 보고 이내 눈물이 터져버렸다.
오랜만에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울고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요즘 맺힌 게 많은가 보다.
다음날 어린아이처럼 나는 배낭을 메고 시카고 다운타운 H마트로 걸어갔다.
네이비 피어 근처 우리 집에서 걸어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굳이 원정대처럼 걷고 싶었다.
그런데 날을 잘못 골랐다. 정말 히말라야다. 시카고는 Windy city고 특히 이번 겨울은 많이 춥다. 돌아갈까 하다가 " 사내 녀석이 한번 칼을..." 하곤 다시 걸었다.
극한에 대한 오기가 생겼다. 고난과 인간의 애착을 정밀하게 통찰한 폴 블룸 paul Bloom의 말처럼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에는 쾌감이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백팩에 한국음식을 한가득 담고 히말라야 하산길처럼 걸었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거듭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얀 이밥, 오뚝이 햇반,에 안성탕면을 끓였다. 순간 우리 집은 베이스캠프가 되었고 나는 K2 정상을 정복하고 귀환한 산악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