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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Nov 17. 2023

승부욕 길들이기

요가를 통해 배운 태도를 삶에 적용한다면?

난 선천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기질을 타고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초등학교 때 저녁에 방바닥에 엎드려 수학문제를 풀다가 이해가 안 되고 너무 어려워서 소리 내서 울었다. 울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면 책을 찢기도 했고. 한 번은 남자친구랑 데이트코스로 보드게임을 하러 갔다가 계속 져서 게임판을 엎어 던지고 울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여자친구의 귀여운 투정이라 하기엔 과격하고 살벌해 아마 그는 매우 무서웠겠지 싶은 것이다.


이런 타고난 승부욕은 학교의 매 시험 점수를 매기는 절대평가시스템에 아주 좋은 무기였다.

(고등학생 때 수능공부를 하면서 노력이랑 공부머리는 별개라는 걸 깨달았지만) 내 경험상 적어도 중학교 때의 성적은 노력이랑 정비례했다. 나는 공부하는 과목뿐만 아니라 예체능 과목도 언제나 만점을 향해 항상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데, 덕분에 매 학기 주어지는 체육 수행평가 종목들 농구, 멀리뛰기, 배구, 줄넘기 등등을 거의 다 만점을 받았었다. 만점을 받지 못한 건 타고난 민첩성에 영향을 받는 종목인 배드민턴과 육상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일화라면, 한 번은 30초 안에 농구 골대 아래서 10번 골 넣으면 만점인 수행평가가 참 어려워 매일 저녁 학교 운동장에 가서 캄캄한 운동장에서 연습을 했었다. 하루는 한 아줌마가 나한테 와서는 이웃중학교 체육교사인데, 밤산책하러 왔다가 혼자 너무 열심히 하는 거 보고 팁을 좀 주러 왔다면서, 10분 정도 짧은 수업을 해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도움닫기 멀리뛰기는 매일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에 가서 몇 번씩 반복하여 뛰어보고 연습해 만점을 받았고, 배구의 언더토스와 오버토스도 학교 가기 전 매일 아침 6시에 해 뜨면 일어나서 잠옷바람으로 집 앞에서 연습해서 엄마가 밥 먹으라고 말해도 한 번만 더 하고 간다고 미루느라 엄마한테 자주 혼날정도였지만, 그래도 만점을 받았었다!!


아, 승부욕에 관해 성인 돼서도 웃긴 일화가 하나 있는데, 난 첫 시즌을 로컬회계법인에서 뛰었다. 그때 같이 일하던 회계사님이 스키 멤버십 끊어놓고 못 가고 있다며 곤지암스키장 근처 필드였던 날, 퇴근하고 다 같이 스키를 타러 갔었다. 물론 나는 스키를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날 다른 여자회계사님이랑 둘이 첫 교습을 받았었다. 두 번째 스키장을 간 날, 멤버십을 끊어놓은 회계사님이 같이 중급코스에 가볼 테야? 했는데, 다른 여자회계사님은 무서워서 싫다 그랬지만 나는 겁 없이 리프트를 타고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니 경사가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천천히 감을 잡고 나니 눈앞에 멀찍이 보이는 회계사님을 너무 앞서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청나게 속도를 올려 그 회계사님을 앞질러서 마구 달렸는데 뒤에서 달리는 내내 회계사님이 "회계사님!!!! 조심해!! 천천히 가!!" 외치시던 그 웃픈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이후로 내 승부욕에 아주 혀를 내두르며 시즌 내내 나만 보면 절대 도박에 손대지 말라고, 도박에 빠지면 아주 큰일 날 성격이라며 인생 조언을 해주셨다.




이런 기질 덕분에 20대 초반시절까지 나는 내가 목표하는 걸 모두 이루고 살아왔다. 그러다 내 노력 하나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자만심 넘치게 살아오던 인생이 대쪽같이 꺾이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대 중반 연애를 하다 처음으로 이유도 모른 채 남자친구한테 잠수이별로 차인 것이다!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인지라 내 노력으로 모든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 즉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그땐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늘 그래왔듯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상대의 취향에 온전히 맞추려 노력했고, 그러면서 상대의 마음을 사려 시간을 들일수록 오히려 나는 지워지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때 당시 내 블로그명은 "Always be Myself"였고, 꽤 오랫동안 이 블로그명을 사용했었는데, 20대 중반 연애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는 절대 나를 잃지 말자는 다짐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찾기 위해 시작한 게 요가였다. 사실 요가를 규칙적으로 시작하게 된 건 그다음 사귀었던 남자친구 덕분인데, 그 사람은 항상 본인 취미가 연애보다 우선이었던지라 나는 자연스레 그의 여가의 여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모든 걸 상대에게 맞추기보다 나도 동등한 입장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선택한 취미생활이 요가였던 것이다.


그때의 연애도 종지부를 찍었지만, 덕분에 얻은 요가라는 취미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궁극의 이유라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중학교 때 노력으로 수행평가 만점을 받아온 다른 종목들과 달리, 아무리 시간을 들이고, 노력하고, 연구하고, 힘을 써도 되지 않는 자세들이 있다. 처음에는 보통의 나답게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승부욕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초등학생 때 엎드려 수학문제를 이해 못 해 엉엉 울던 모습이 요가매트 위에서 그대로 발현되었다. 요가원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내가 수치스러워 매번 요가에게 지던 시절이었다.


나랑 싸우고 요가랑 싸우는 마음으로 매트 위에서 움직이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반복해 경험하면서, 비로소 요가는 이기고, 성취하고, 노력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관계 다음으로 만난 "노력으로 쟁취할 수 없는 분야"로 요가를 바라보니, 자연스레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연구하고 연습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영적여정이 시작되었다.


약 5년의 시간 동안 매일 새벽 아쉬탕가요가를 수련하면서 나의 내면을 울창하게 가꿀 많은 씨앗을 발견하였다. 아주아주 미세하게 몸이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꽃봉오리가 만개할 때까지를 기다리는 인내심, 그리고 거기에 스스로를 굳건히 믿는 마음을 잠재의식에까지 확장시킨다면 그것이 꽃봉오리의 만개를 돕는 물과 햇살이 된다는 것. 그리고 온 노력을 다해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함, 그런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볼 때 상대를 이해하기 쉬워진다는 것 등등.




요즘 스페인어를 새로 배우며, 타고난 기질인 승부욕과 후천적으로 받아들인 마음들을 비로소 적절히 균형 맞게 사용하고 있다. 공부하는 순간에는 절대적 목표는 없이 주어진 강의와 진도에 충실히 임하고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짜릿하다. 거리에 나가면 말이 너무 빠르고 모르는 단어가 아직 한참 많아 못 알아듣는 게 태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자라나는 스페인어실력을 믿고 기다리며,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겪으며 큰 응원을 받는다.


어제는 가게에 들어가 교통카드를 충전하는데, 주인아저씨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바람에 아저씨는 종이랑 펜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며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소요가 많이 된 바람에 내 뒤로 줄이 길어졌는데, “미안합니다.”라고 하니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이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이런 예상치 못하게 따뜻한 상황들로 "말을 유창하게 못한다면, 나를 깔보고 무시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서서히 부수고, 지금 그대로의 부족함을 스스로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기고 싸우고 증명하지 않아도 노력하는 모습 자체에 있는 나의 잠재력을 믿기로 했다.


이기고 싸우려는 마음 너머 항복하고 인정하고 내맡기는 마음을 낸다면, 세상을 정복하진 못하더라도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음을. 길들이려야 길들여지지 않는 나의 타고난 기질, 승부욕은 무언가를 이기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세계 그 너머와 연결되어 마침내 내가 가둔 내 세상에서 나오게끔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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