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첫 전공은 식품영양이다. 그리고 대학교1학년 때 첫 강의에서 틀어준 영화 '슈퍼사이즈미'를 보곤 충격요법으로 음식을 가려먹기 시작했다.
맥도널드 같은 인스턴트 햄버거, 라면은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고 편의점 음식은 손도 안 대던 20대의 나... 밸런스게임으로 평생 탄산 안 먹기 vs 평생 라면 안 먹기 선택지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평생 라면 안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하던 나...
해외생활에 가장 바뀐 입맛이라면... 라면... 라면이 생필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해외 생활에서 라면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맛뿐만이 아니다. 음식은 문화를 품고 있어서일까? 새로운 장소에 가면 더욱더 한국음식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같은 스페인에 있더라도 지금 자리 잡은 도시에서보다 새로운 여행지에서 며칠 지낼 때 익숙함에 대한 갈망이 한식에 대한 그리움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럴 때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한국의 맛은 라면이 최고다. 적당히 맵고 국물 있는 요리를 찾기 힘든 유럽에서는 더더욱-
요즘 완전히 꽂혀버린 라면이라면... 까르보불닭... 한국에서 먹을 땐 하나를 다 먹진 못했던 것 같은데, 유럽에서는 라면 한 봉 지도 금세 먹어버린다. 그리고 요즘 불닭볶음면 1 봉지를 온전히 소화해 내는 내 위장도 요즘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다.
2019년,
직장 다니던 시절, 업무스트레스에 찌들어서 퇴근하고 가득하던 보상심리를 해소할 방법은 음식뿐이었던 것 같다. 혼자 일할 때는 빵을 잔뜩 사서 먹곤 했는데, 이때 많이 안 좋아진 소화력 + 감사본부로 옮기 고나니 늘어난 출장과 회식 때문에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 고급음식과 술을 많이 먹게 되었다. 업무연장이다 보니 부담감도 있었고, 소화력 걱정과 몸에 좋은 거 안 좋은 거를 계산하면서 먹느라 별로 즐기질 못했다.
2020년 말-2021년 초,
그러다 시즌에 결국 스트레스가 폭발했고, 회식자리에서 양껏 먹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오면 다 게워내고 다음날 또 회식하고 게우고. 월화수목금 5일 중 3일을 먹토를 반복하고 나서야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비지시즌은 시간이 지나면 끝나지만 만약 버릇이 들어서 그 이후에도 업무량이 많아지거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양을 조절하지 못하고 먹을까 봐 나도 다루지 못하는 내가 마음 한편에 있었다. 그땐 그게 폭식증이라는 걸 알면서 인정하기를 피하고 싶었다. 오래된 소화불량과 폭식증 증상은 어느새 얼마큼의 양이 나에게 맞는 1인분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때 라면 1개조차 온전히 먹기를 꺼렸던 것이다.
2021년 중순 심리상담을 받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잠시 다뤘었는데, 상담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감정을 음식에 이입시키는 것 같은데? - 건강한 심신을 가진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그걸 어느 정도 홀드하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걸 알거든. 근데 지혜는 그걸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겪으면 그걸 어떻게든 빨리 떨쳐버리고 싶어서 음식을 몸에 잔뜩 채우고, 그걸 게워냄으로써 감정마저 흘려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상담을 마치고 퇴사를 하고도 폭식증은 걱정대로 나아지질 않았다. 다이어트를 마음먹고 해 보려던 2022년 초, 폭식증이 다시 심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땐 8주 자가치료 워크북인 '내 몸을 사랑하게 되는 날'이라는 책을 구매해 책에 나오는 대로 8주 동안 성실하게 임했다. 책의 가이드대로 먹은 시간, 음식의 양질, 먹을 때의 감정과 느낌을 매끼마다 적는 #식사일지는 조금 귀찮았지만 데이터가 쌓일수록 내가 어떤 감정으로 음식을 먹을 때 게워내고 싶어 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엑셀에 식사일지를 적었고, 주관적으로 불필요하게 먹은 간식 등을 자주색으로 표시, 많이 먹었다고 느껴지는 날은 보라색 음영을 표시해서 분석을 했다. 어떤 상황과 감정과 느낌이 나에게 가짜배고픔을 당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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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폭식증의 원인을 3가지로 나눈다.
다이어트 강박과 몸매 강박
부정적인 감정을 음식에 이입시키는 경우
건강한 음식에 대한 강박 - 본인이 생각했을 때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을 경우, 독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게워버리는 정신적 강박
내가 겪은 폭식증은 3가지가 복합적으로 연결돼있었던 것 같다. 저 책을 읽으며 워크북의 내용대로 모든 숙제를 마치고 2022년 5월, 발리로 떠났었는데 발리에 지내는 5개월 동안 2번의 토를 했고, 점점 줄어든 그 빈도는 이제 0으로 수렴되었다.
식사일지를 꼼꼼히 적으며 분석한 결과 내가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순간은 이랬다. 나는 ①술을 마실 때, 그리고 ②주변 분위기가 들떠있어 거기에 영향을 받을 때(축제나 회식이나 모임 같이 강렬한 분위기), ③불편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그 후 혼자가 되었을 때, 위험한 순간이다.
2023년 초, 한 번 위기가 있었다.
3월 초 발렌시아 거리가 축제로 들썩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흥에 취해 거리를 거닐며 와인과 음식을 잔뜩 먹었다. 결국 마지막에 주문한 피자를 다 먹지 못해 포장을 해서 집에 오는 길에 토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과 간신히 싸워야 했다.
S에게 이 충동을 말하니 '그냥 자라고, 하루 정도는 괜찮다고, 자기도 똑같이 먹었다'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진정되지 않아 10분 간격으로 말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다.
"그냥 자라고!!! 네 위장은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냥 자. 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위장은 내가 생각하는 거보다 강하다.'라고 자기 암시를 해봐."
이제는 몸에 좋은 거,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의식적으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먹을 때, 순간에 집중한다. 그러면 먹을 때 몸이 그 음식을 반기는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제저녁에 직접 만든 호박수프와 평소 식사 후 마시는 허브차는 먹을 때 몸이 쭉쭉 빨아들이는 게 느껴져 먹으면서도 기분이 좋다. 그렇게 대체적으로 건강한 식습관을 자연스레 유지하게 되었다.
불닭볶음면이 당기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아, 지금의 환경이 유난히 낯설다는 향수 어린 마음이구나. 그런 마음이 지속적으로 올라오면 냄비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끓여 정말 기쁘고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가끔 분위기에 취해 절제하지 못하고 술과 음식을 양껏 먹었을 때도, 지난번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위장을 믿으며, 내일 가볍고 건강하게 먹으면 괜찮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어졌다.
친한 친구들은 묻는다. '유럽은 밀가루음식 많은데 너 음식은 괜찮아? 소화불량 심했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지금 스페인에서 매운 인스턴트라면, 주식으로 빵과 파스타, 아침 공복에 커피와 오렌지주스, 반주로 마시는 와인과 맥주를 즐기는 게 가끔 스스로도 신기하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음식의 양과 질보다 중요한 건 먹을 때의 마음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폭식증의 원인은 결국 머리와 마음의 충돌에 있다.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머리가 통제하기 시작하면 마음의 신호와 완전히 단절되어 버리고, 그렇게 잠재의식에 축적된 마음의 신호들이 어느 순간 폭발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은 폭식증이 정말 끊어내기 까다롭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나는 폭식증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노력과 관심으로 완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어떨 때 마음이 취약해지는지, 어떤 상황에서 나를 더 돌보고 챙겨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정해져 있는 '상'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이 살을 빼고 운동을 하고 식이조절을 하고 성형수술과 시술을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정답일 수 없다.
모두가 내면에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될 것이다.
폭식증을 극복하려 노력하면서 만난 수단(심리상담, 워크북, 다양한 경험들)들은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되었다. 이 글을 통해 식이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이고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그 기회를 만날 수 있는 신호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작 라면 한 봉지를 온전히 즐기는데에 많은 시간과 과정을 거쳐왔다. 그래서 요즘 먹을 때마다 더욱 기쁘고 감사하고 의미가 깊은 그런 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