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은 만월이 뜨는 날이었다. 스페인 시간 기준으로 오전 10시가 만월시간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랬을까? 아침러닝을 하면서 어떤 큰 기운을 느꼈다. 이번 나에게 온 만월의 메시지는 회계사라는 직업을 놓아주라는 것이었다. 오늘에서야 확실히 선언한다 - 나는 회계사로 다시 일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회계사로 일하는 게 힘들었던 이유를 명확히 깨달았다. 나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회계사가 된다”의 목표만 가지고 달렸을 뿐, 그 이후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에 대한 부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즉, 나의 명확한 목표설정은 회계사가 되는 단계 까지였어서 그걸 위해 달려 목표를 이뤄냈지만, 그동안 그렇게도 공허했던 것이다.
나는 왜 회계사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 이면에는 지금껏 인정하지 않았던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숨겨둔 못난 모습들이 있다. - 열등감, 자격지심, 지위획득,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금전적 풍요로움 등등. 마치 회계사가 되면 막연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산다. 잘 산다라…
동화의 끝맺음처럼 나는 회계사가 된 이후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함께 합격한 기수들과 다시 새로운 스타트라인에서 새로운 경쟁을 시작했다. 전문직이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자격증을 획득 후 회계법인에 입사하면 같은 조건으로 만난 사회초년생 300명의 동기들과 인생을 쌓아가는 과정을 비교하기 시작하며 말이다.
입사 전 교육을 받을 때에 강사를 맡은 매니저들은 “지금은 모두 똑같은 주니어지만, 5년 후에 그 성장의 차이가 무섭게 갈린다.”라는 말을 한다. 입사 후엔 다들 이런 말을 한다. ”일 못하는 사람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아? 스케줄표에 유난히 일이 없는 사람이 일을 못하는 사람이야. 일을 못하면 일을 안주는 방식으로 조직에서 내치거든. “
이런 사실인지 모르는 말들을 접할 때마다 조직에서 도태되는 막연한 두려움에 숨이 턱 막히고 불쾌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시작한 직업이어서였을까, 또다시 인정받기 위해 무한 책임감을 다지던 날들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이나 사례를 주고받기 보다 ”사전 자료 보고 알아서 하고, 절대 실수하지 말아라. “ 의 내적 명령 속에서 일을 해냈고, 잘 마쳤을 땐 성취감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은 마치, 한바탕 불길 속에서 불씨를 껐을 때의 느낌 같았는데, 그 말은 즉슨 평소에 업무를 할 때면 내 몸은 재난상태를 마주한 것처럼 반응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발현되는 패턴이 있는데, 나는 낯선 상황에서 어떻게든 혼자 내적으로 불안함을 통제하며 알아가려고 하지, “잘 모른다. 도와달라.”라고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깎아내릴 것이라 굳게 믿었던 탓이다. 그래서 S는 가끔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몰래 식당을 예약하고 데려가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생소한 언어와 메뉴를 보고 있을 때 나는 자주 패배감과 공포감을 느끼다 가끔 조절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기도 한다. (결국 식사 후 눈물이 그치고 기분이 나아질 때쯤 S는 계산하면서 종업원에게 조용히 '감사합니다! 음식 덕분에 제 여자친구가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잘 만나볼게요!'라며 농담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는 것까지가 그의 서프라이즈...)
“그런 심정이었으면 잘 모르겠는데 도와줄래?라고 도움을 구할 수 있잖아. “라는 S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 그런 옵션이 있었구나.’ 알아채고 먹먹해진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크게 반응하는 내 모습을 이해하는 지금에서야 그동안 내 안의 상처를 무시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일하며 답답할 때마다 자주 과거를 돌아보고, 대학생 때 반짝반짝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 나의 반짝거림은 무언가 분명한 목표를 향해 의도를 가지고 매일 성취해 나가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싶은 걸 찾아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남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다. 이런 상태로 어떤 직업을 구하고 성취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사실을 마주했을 것이다.
20대의 시절 전반적으로 겪은 우울과 아픔의 시절을 이제는 담담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일은 나의 존재를 외부에서 허락을 구하고 있는 자세를 멈추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달려온 지난날의 과정이 남긴 상처를 치료하며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존감이라는 믿음을 새로 일구어나가며 탈바꿈시킬 때다. 그래야만 진정 나를 위한 새로운 목표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 회계사라는 직업에서 가져갈 기억은 딱 하나다. 분명한 목표와 그걸 이루기 위한 의도를 담은 매일의 과정 속에서 나와 내 주변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다음 목표는 정말 정말 크게 세우려 한다. 그걸 위해 달릴 남은 내 인생 전체의 모든 날들을 반짝반짝하게 만들고 싶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