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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Dec 19. 2023

가회동 마을변호사 상담일지

2019.12.06

오늘의 마을변호사 상담자는 임대인.

한눈에 세련되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깨끗한 피부의 볼이 추운 날씨 덕에 살짝 얼어 있었다. 투명한 안경을 쓰고 나이에 비해 주름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은 첫인상이 참 좋았다. "저는 임대인인데요", 라며 말문을 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종이에 필기를 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였다.

요약하자면 임차인이 자신의 새로운 임대차 계약에 훼방을 놓았고 임차인의 엄마가 부천에서 부동산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뭔가 이상해서 내용증명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계약 만료일은 언제였나요?
계약 만료일은 이미 11월 중순으로 시기가 지났다.

나에게 보라면서 건네준 핸드폰 문자들을 쭉 다 살펴보아도 보면 볼수록 차후 임대인을 못 구했다는 핑계로 계약 만료일이 지나도 돈을 주고 있지 않은 임대인이 괘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부터 내게 그 여자의 얼굴은 비합리적이고 탐욕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아니 임대차 계약 만료 전 3개월부터는 무조건 집을 보여줘야 한다는 법 규정은 없나요? "부터 시작해서
"내가 경찰 입회 하에 부동산이랑 집에 들어가겠다는데 왜 집 비밀번호를 그렇게 안 알려주나요?"
"1억 5천이면 큰돈인데 당연히 그걸 알려주고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나요?"

가관인 질문들을 해대는 여성의 기세가 등등하다.

우리나라 법에서 임대차 계약 끝나기 3개월 전부터는 무조건 집을 보여줘야 한다는 법 규정은 당연히 없다. 24개월간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으면 그 집은 소유주라 하더라도 소유자 맘대로 사용 수익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 기간 동안은 전세금을 지불한 임차인의 집이다. 임차인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요구이자 무리한 당황스러운 요구다.

"지금 상담자께서 내용증명 보내실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빨리 마련해서 하루빨리 그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임차인에게 돌려주세요."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마음을 가라앉혀서 혀밑에서 끓어오르는 '아니 전세계약 체결할 때 받은 떡두꺼비 같은 남의 돈 1억 5천은 어디 써버리고 돈 없다고 그러신대요?'라는 말은 넣어두었다.

머쓱하게 나서는 중년 여성의 얼굴이 더 이상 처음처럼 예뻐 보이지 않았다. 억지를 부리며 고상한 척하는 한 명의 악덕 임대인이 서류를 주섬주섬 챙겨 상담실을 나갔을 뿐이다.



*4년 전, 저장만 하고 발행하지 않았던 글을 손보아서 오늘에서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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