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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Oct 25. 2024

고구마, 그게 뭐라고


바야흐로 고구마의 계절이 왔다. 고구마는 무조건 꿀고구마를 사서 에어프라이에 군고구마로 구워 먹는 것이 나는 가장 맛있다. 어릴 때 먹었던 밤고구마가 퍽퍽했던 기억이 있어서 나는 원래 고구마를 싫어했는데, 어쩌다 편의점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릇 맛있게 파는 군고구마를 제대로 한 번 먹어본 이후로는 겨울만 되면 군고구마가 기다려진다.


일단 꿀고구마는 숙성을 잘 시켜야 제대로 달아진다. 숙성을 잘 시킬 재주가 없는 나는 아예 판매자가 숙성까지 제대로 잘 해준 상태로 파는 꿀고구마를 산다. 그럼 나는 받자마자 에어프라이어에 한 시간 정도만 노릇하게 구워주면 끝이다.


아무 공정도 필요 없다. 그거 잘 숙성된 고구마를 물에 잘 씻고 물기를 닦아서 넣기만 하면 끝이다. 성의를 더하고 싶다면 그냥 손가락 한마디정도의 작은 칼집만 내주면 정말 끝이다. 어려울 것도 없이 온 집안에 달콤한 냄새가 가득 차니 기대감으로 인한 행복은 덤이다.


맛있는 걸 먹는 기쁨도 크지만, 맛있게 구워진 고구마를 잘 준비해 두었다가 타이밍에 맞춰서 아이들에게 짜잔~ 하고 내주는 기쁨은 또 별미다. 특히나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다녀온 첫째 아들이 좋아하겠지? 하면서 고구마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마음이 든든하고 달콤하다.




남편이란 존재는 모름지기 이뻤다가 미웠다가를 주기적인 그래프를 그리며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인데, 요즘의 남편은 미운주기에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만나서 술 먹고 늦게 들어오더니, 며칠 전에는 몰래 담배까지 피우고 들어온 게 딱 걸렸다. 더더욱 괘씸한 것은 무슨 담배냐 말도 안 된다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가 개코인 나에게 딱 걸려서 탈탈 털렸다는 사실이다. 아들놈들이 거짓말을 살살 쳐서 이거 어떻게 훈육해야 되나 고민을 했었는데, 남의 집 40살 넘은 아들놈까지 내게 거짓말을 하다 걸리니까 그저 기가 막혔다. 흥부가 기가 막혀


화를 내기에는 남편 잘못으로 내가 화를 내면 괜스레 아이들이 불안에 떨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다음날 아침에 카톡으로 퍼부었다. 그냥 담배를 피울 거면 제대로 고지를 해줘라 맞담배를 피자. 담배씩이나 피우면서 대체 애들한테 김치 한 번에 두 조각씩 먹지 마라 짜다 건강에 안 좋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잔소리할 자격이나 있는 거냐. 오만 사방 건강에 짜게 먹지 마라 부모 형제 자식에 잔소리는 겁나게 해대면서 정말 내로남불 쩐다. 너님이나 잘해라. 스스로를 돌아봐라. 제발. 웬만한 거는 담배보다 낫다는 걸 모르냐.


남편은 자기 잘못을 알기에 풀 죽어서 웅.. 이런 답만 날리면서 귀엽지 않은 귀여운 척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에 고구마사건이 벌어졌다.




10시에 학원이 끝나는 첫째를 데리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그런 날이 딱 두 번 있는데 하필이면 오늘 또 남편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운전을 못한다.


빠직. 일주일에 꼴랑 화목 두 번 있는데 이미 내가 한번 화요일에 픽업을 했으면 적어도 오늘은 본인이 할 줄 알았는데 또 술을 먹고 들어왔네. 한번 빠직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내 아들 내가 데릴러가는거 뭐 손해도 아니다 싶어서 그냥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하려는데, 온 집안에 고구마 냄새가 나는 타이밍에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아 고구마 먹고 싶다’ 이랬던 게 떠오른다. 갑자기 살짝 불안해져서, 거기 구워둔 고구마 3개는 애 학원 끝나면 먹게 구워둔 거니까 먹지 마라! 이렇게 말하려고 전화를 거는데 전화를 또 더럽게 안 받는다.


에이 설마 내가 지금 늦게 학원 수업 마친 애 데리러 가는 거 알고 게다가 내가 3개나 구워놨고, 한 번 굽는데 한 시간씩 걸리는 거 아는데. 먹더라도 자기 아들 꺼 하나는 남겨놨겠지~ 생각을 하고 그냥 전화를 다시 걸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들놈을 픽업 가니 열공하고 오는 줄 알았던 요놈은 진즉에 학원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편의점에서 마니또 선물을 신나게 30분가량 쇼핑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고 내 혈압은 두 번째로 빠직하고 올라갔다.


이거 이거 어떻게 갱생을 시켜야 하나 아직 어린데 기회가 있는 것이겠지 반성을 어떻게 시키나 이렇게 어지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오 마이갓.


내 군고구마가 하 나 도 없었다.

정말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이 아예 안 떨어졌지만

뭐 이런 경우가 있지? 하는 생각과

표정은 내가 안 봐서 모르지만 마피아 같았을 것이다.

분명 살기가 느껴졌을 것이다.


이거 어떻게 처단해야 되지? 생각만 하는데

알딸딸한 내 미운 남편은 해맑게 웃으면서

고구마 방금 3개 넣어놨어^^라고 한다.

그래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보니

새하얗게 발가벗은 고구마들이

그것도 채칼의 상처를 간직한 채 수줍게 들어있었다.


아…




그 순간만큼은 정말 내가

직업적으로 창 칼 포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서

과녁들을 다다다다다 명중시키고 싶었다.

창문 밖으로 아아아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근데 정말 치사하게 고구마 가지고

이혼을 할 수도 없고 총알을 날릴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싸늘하게

“누가 군고구마 굽는데 껍질을 벗겨서 구워

그런 군고구마 태어나서 본적 있니 정말 황당하다

그리고 굽는데 한 시간 걸리는 거 알면서

혼자 다 먹고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이제 막 넣어두면 누가 언제 먹어?

하나정도 남겨놔야 애가 먹을 거 아니야? “

끔찍하다는 듯 쏘아붙이는 것뿐이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한없이 바보 같은 남편은

또 풀이 죽어서 말없이 고구마만 바라본다.

고구마가 하나밖에 없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들은 척도 안 해준다 나는.




결국 거짓말하고 땡땡이치던 내 아들놈은

나에게 눈물 콧물 쏟으며 단단히 혼이 나고

고구마를 못 먹은 채 잠이 들었고


분별없이 아들 줄라고 해둔 고구마를 맛있게 냠냠

생각 없이 모조리 다 잡순 남의 아들놈은

고구마를 먹은 채 혼나고 잠들었다.


그리고 이제 새벽에 남아있는 건

발가벗은 채 채칼로 요상하게 벗겨져서

팍팍하기 짝이 없는 밤고구마 뺨치게

맛없게 구워진 고구마와 나.



저 꼴로 누워있는 고구마 놈들이 보기 싫어서

반이라도 쪼개 보았더니 영락없이 퍽퍽하기만 한

밤고구마 꼴이다.

얇디얇은 그 자주색 고구마 껍찔들이 고구마 속살들을

더욱 촉촉하고 쫀득하게 구워질 수 있게 해 줬을 텐데

그 얇은 껍질 좀 없다고 고구마 살들이

보호받지 못한 채 말라비틀어져 발뒤꿈치처럼 되었다.


분이 안 풀려서 자고 있는 남편 녀석에게 가서

조용하게 단호하게 말한다.

“저 이상하게 맛없게 된 껍찔없는 고구마들

당신이 내일아침에 무조건 다 먹고 가라 진짜‘


그래도 맘은 별로 안 풀린다.

잘못한 두 놈들은 처단을 했는데

기분은 아주 엉망에 바닥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았나.




그 얇디얇은 고구마 껍질 같은 게

내 열받는 마음을 잘 감싸고 있어 주었다면

내 마음이 팍팍한 밤고구마 같이 안되고

꿀이 흐르는 꿀고구마처럼 부드러울 수 있었을까.


그 얇은 껍질은 혹시 내가 좀 더 인격이 성숙해지면

나올 이해심 인내심 포용심 같은 걸까.


나는 참 아직도 멀고도 멀었다.

오늘 하루 정말 팍팍한 날이다.


고구마,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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