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제 May 09. 2024

뭔가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까먹었을 때

퇴근 시간 만원 지하철에서 꽃을 사수하는 마음으로


지금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러나 너무 익숙해져서 어떻게 소중히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이 방법을 추천해 드려요.


어느 식당이든 줄을 길게 선 평일 점심시간에, 요즘처럼 의외로 볕이 따가운 낮에, 휴대폰 지도 없이 물어 물어 남대문 꽃시장을 찾아가 보세요.


행인들의 손가락을 따라 도착한 건물 앞에서 꽃이라곤 없을 것 같은 삭막함을 마주해요. 헛걸음한 것은 아닌지 슬슬 짜증이 솟구칠 때쯤 바로 위층이 꽃시장이라는 걸 알아채고, 드넓은 상가 안에 들어서서 잠시 진동하는 꽃 향기를 누려요.


간판마다 다 다른 가게인 줄도 모르고, 이쪽 꽃을 가리키며 저편에 서 있는 다른 가게 주인을 불렀다가 눈칫밥을 한번 먹고요, 좀 더 신중히 고른 꽃을 가게 주인에게 내밀어요.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꽃 가격을 듣고 횡재한 듯한 기분도 잠시 누려보고요.


자, 이제 신문지에 동기 동기 싼 그 꽃을 들고 따듯한 밥 냄새가 풍기는 남대문 시장 거리를 지나요. 그렇지 않은 척해도 꽃처럼 덩달아 아름다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조금은 천천히 걸어요.


직장인들이 막 빠져나간 카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다, 천천히 역을 향해 걸음을 옮겨요. 저녁 5시 반.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나름의 요령으로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난 직장인들이 역사로 쏟아져 들어와요. 당신은 신문지에 엉성하게 싸인 꽃을 사수하고자, 옆으로 맨 가방에 줄기 부분을 넣어두고 코알라가 나무를 안듯 가방 전체를 둥글게 끌어안아요.


당신의 옆에도, 뒤에도, 앞에도 사람이 있고 모두가 종종걸음을 걸어요. 순식간에 후덥지근한 열기가 주변을 휘감아요. 가방에 담긴 꽃의 연한 잎사귀가 저항 없이 나부끼고 커다란 꽃망울은 똑 떨어질 것처럼 위태해 보여요.


플랫폼을 지나며 교통카드를 찍고요.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람들로부터, 꽃망울이 떨어지거나 잎사귀가 접히지 않도록 맨 팔로 울타리를 만들어요.


마침내 환승역에서 어느 정도의 사람이 내리고, 당신 앞에도 자리가 하나 나요. 가방 위로 한참을 삐죽 솟은 꽃이 유난스러워 보일까 걱정스럽지만, 집까지 안전하고 온전하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가방을 발 밑에 놓으려다, 무고한 발길질이 걱정돼 불편한 방법을 택해요.


무릎에 꽃이 담긴 가방을 올려다 놓고요. 열기로 인해 추욱 쳐진 꽃이 옆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팔도 다시금 울타리를 만들어요, 그렇게 한 시간을 가요.


번잡한 서울의 주요 역들을 지나, 사람이 울컥, 울컥, 빠져나가는 역들을 지나, 서울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마침내 달리는 지하철 안에 공석이 군데군데 생겨나요. 당신 옆자리까지 비었을 때 그제야 굳은 자세를 펴고 꽃이 담긴 가방을 옆 자리에 놓아요.


미세한 흔들림에도 가방이 쓰러져 꽃이 뭉개지진 않을까 얇은 가방 끈 두 개를 단단히 그러쥐고, 남은 거리 동안 한 손으론 웅크렸던 어깨를 조물거려요.


마침내 역사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 아직 남아있는 노을이 꽃을 비춰요. 1시간 남짓, 사람과 기계가 뿜어내는 열기를 그대로 머금은 꽃은 싱그러움이 어느 정도 가셨지만, 그 커다란 꽃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꽃받침과, 꺾이지 않은 줄기를 보며 감탄해요. 안도해요. 경이로워해요.


집에 와 등이 축축하게 젖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안타까운 꽃이 물기를 제대로 빨아들이길 바라며 투명한 꽃병에 물을 가득 담을 때까지 양지바른 곳에 꽃병을 잘 세워둘 때까지 감탄해요. 안도해요. 경이로워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무맥락의 주인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