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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Jun 26. 2024

살살 살어요

퇴사 택시


약 3년 간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회사의 온갖 짐들을 질긴 재질의 커다란 숄더백에 담아 온 날.


덜그럭거리며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 다다랐을 무렵 고생한 몸을 위해 택시를 탔다.


"XX 아파트요"


된소리 발음의 아파트 이름을 듣고 기사님이 곧장 노래를 지어 부른다.


'아 잘못 탔다'


금방 퇴사하고 온 복잡한 내 마음에 기사님의 유난한 텐션은 정장에 신은 형광 양말처럼 소화하기 어려웠다.


차시트에 편하게 기대어 가고 싶었건만 하필 이렇게나 텐션이 높은 분을 만나다니 쉽지 않구나.


10분이다. 10분만 참으며 가자 싶은 찰나 "주방 도구 샀어요?" 말을 걸어오는 기사님.


일반적이지 않게 커다란 가방 안에서 덜그럭거리던 미지의 소리가 주방도구 소리 같았나 보다. 그 추측이 재밌어서 답했다.


"아뇨 퇴사했어요"


"퇴사를? 이 엄동설한에? 이직할 곳이 있어요?"


"그냥 했어요 힘들어서요"


어떤 잔소리가 들려올까 눈을 질끈 감기도 전에 "아 그럼 관둬야지" 하시던 기사님의 묵묵한 뒷모습.


퇴직금은 제때 들어오냐고 물어보시더니 대답하기도 전에 "제때 안주는 개새끼들이 있어요" 또 혼자 답을 내린다. 뭐지 이 시원함은.


그러는 동안 위험요소를 제공하는 앞뒤좌우의 무례한 운전자들을 향해서 적시에 탁탁 시원하게 욕을 내뱉으신다. 그 욕설이 어찌나 정당한지 조금만, 조금만 더 치자 싶은 조미료처럼 감칠맛이 났다.


금방 만난 손님인 나의 편을 거칠게 들어주시는 기사님을 보며 인생을 다시 살면 욕을 달게 뱉는 법부터 배워볼까 싶을 정도가 되었다.


아파트가 보이는 길목에 들어서자 아쉬워지기까지. 요즘 다시 역주행 중인 이효리의 텐미닛은 이 택시기사님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비합리적 의심을 하며 꾸물 꾸물 짐을 챙겼다. 이 택시가 야근 택시였으면 기사님 욕을 한 시간은 더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질척거림을 뒷좌석에 뭉근하게 남기는 사이 정말로 집에 다다랐다.


카드로 결제하는 동안 기사님은 저스트 원 텐미닛의 피날레를 찍는다.


"살살 살어요 아직 젊은데"


약간 혼란했던 마음을 착 가라앉히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덕분에 웃으며 왔어요 조심히 가세요" 길게 인사를 늘이는 내게


"천천히 내려도 돼요 천천히 해요" 하시는 한없이 부드러운 기사님.


탁, 문이 닫히기 전


"가서 쏘주 하나 빨어요!"


아, 진짜 피날레는 이거였구나. 팡파레 같은 기사님의 시원스런 음성이 내게 튀어와 안긴다.


6,300원 택시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명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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