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
소설을 읽지 않은 지는 좀 되었다.
책이라고는 소설과 에세이만 읽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기 계발 도서나 업무 관련 도서만 쏙쏙 골라 읽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나면 얄팍한 지식이나마 얻어 당장에라도 어설프게 알은체를 할 수가 있었더랬다. 어제 읽은 걸 오늘 써먹는 편리함을 맛보고 나니, 가상의 인물이 겪는 사건을 담은 소설이라는 장르는 쓸모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누군가의 이야기를 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지난 수요일, 우연히 어떤 구절을 마주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주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검색해보니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라는 책에 등장한 문장이라고 했다. 퇴근길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구매하고는 곧바로 첫 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그것도 한 여인의 딸, 그 딸이 어머니가 되어 낳은 딸, 또 그 딸이 낳은 딸까지... 무려 4대에 걸친 가족이었다. ‘지연'은 그동안 얼굴을 모르고 지냈던 본인의 조모를 만난 후,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살아온 모습을 처음으로 전해 듣게 된다. 그중에서도 증조할머니인 ‘삼천'과 할머니 ‘영옥’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나는 금세 몰입하기 시작했다.
네 등장인물의 삶이 모두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특히 삼천과 영옥의 삶은 참 고되다. 고되다 못해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다.
그들의 시대는 개인에게서 자꾸 무언가를 앗아가려고만 했다. 지연의 증조모는 동네 처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병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 도망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평생을 고향의 이름인 '삼천'으로 불린다.
삼천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두 눈을 가졌지만 백정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감히 마음 놓고 무언가를 궁금해할 수조차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는 이유로 누군가 돌을 던지면 땅으로 시선을 떨구고 잠자코 맞아야만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못살게 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자신을 백정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친구 ‘새비'를 만난다.
삼천의 딸 영옥은 어린 시절 피난길에 올라 개성에서 대구까지 내려와 살게 된다. 그곳에서 ‘세비 아주머니', ‘희자', ‘명옥 할머니’ 등 소중한 이웃들을 만나 지내던 차에, 자신의 원가족을 되찾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따라 연고도 없는 ‘희령'으로 떠난다. 얼굴도 모르는 가족 때문에 진짜 가족이었던 이들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영옥은, 그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그가 소개한 남성과 혼인을 했다. 그리고 ‘미선’을 낳고 나서야, 남편에게 이미 본처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선이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은 그들을 쉽게 떠났고, 영옥은 혼자의 힘으로 아이를 키워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의 호적에는 자식을 등록하지 못했고, 법적으로 둘은 모녀 사이일 수 없었다. 세상은 '여자가 남편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얻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했다.
이런 삼천과 영옥을 살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새비, 희자, 명옥이었다. 그동안 상처만 받아온 삶마저도 고맙게 느껴질 만큼, 이들의 마음은 그저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었다.
사람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돌멩이에 마음을 털어놓던 삼천에게, 자신이 백정의 딸임을 고백하자 되려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이오?’ 동그란 눈으로 묻는 새비란 어떤 존재였을까. 삼천은 삶이 작정하고 할퀴며 짓누르는 고통보다 새비를 떠나보내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만큼 힘든 이별임에도 ‘새비야, 내 살며 너를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싶었을 터이다.
소설의 어떤 대목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밝은 밤'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보통의 밤은 ‘밝다’는 형용사와는 쉬이 어울리지 않는 시간대가 아닌가. 다만 이것이 참으로 모진 시대와 환경에서도 서로 보듬고 기대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어둡고 두렵고 차가운 밤일 수록, 되려 작은 촛불 하나가 많은 것들을 밝혀주는 법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삼천과 영옥 그리고 미선과 지연의 이야기는 자기 계발 서적에서 접한 지식이나 조언처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야기는 같은 말도 매번 길게 늘여하고, 할 때마다 다르게 한다. 그래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그걸 온전히 즐길 수가 없다.
대신 이야기는 아무리 뻔한 말이라도 뻔한 방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가끔은 가족이라도 서로 너무 미울 수 있다고,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삶이 괴로울 수도 있다고, 그리고 그 삶을 견디게 해 준 사람들과의 이별은 더 날카로운 아픔일 거라고, 그래도 그 사람과 나눈 것이 너무 소중해서 아픔조차도 고맙게 느껴질 거라고......
그냥 들으면 무심코 스쳐 지나갈 법한 메시지를,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 읽는 이의 마음 저- 깊은 곳까지 울려 보냈다.
마음 깊은 곳에 전해지는 울림을 느끼며, 무언가에 부딪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것이 때로는 삼천의 목소리로 때로는 영옥의 목소리로 내게 위안을 건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 접한 이 소설의 구절처럼, 그들은 아마 차갑고 축축해졌을 내 마음을 꺼내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돌려 받은 마음에서는 아마 햇볕의 온기와 뽀송하게 마른 내음새가 남아있겠지.
아, 수년 전 읽은 소설들이 그동안 내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이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