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나 Apr 05. 2022

여행이 되어버린 어느 날의 외출

토요일 오후, 괜히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를 뒤적거린다. 뭐 볼 거 없나?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집에 있던 차림 그대로 겉옷을 하나 걸치고 종종걸음으로 집 앞 편의점 혹은 카페로 향한다. 주전부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집에 들어와 다시 노트북을 켠다. 이 시국에는, 그것도 찬 바람이 두려운 겨울을 지나며 더더욱, 이런 모습으로 보내는 주말이 익숙해졌다.


노트북을 켰다.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를 마치고 ‘보이지 않는 위험' 편을 시작했다. 어린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이야기였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노트북 화면 너머로 다양한 행성을 돌아다녔다. 인간과 겅가족이 살고 있는 나부 행성, 숨겨져 있는 수중 도시, 도시로만 이루어진 공화국, 각종 외계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사막 행성 타투인까지... 우주선을 타고 이동할 때마다 펼쳐지는 낯선 풍경에 눈이 꽤 즐거웠다.


갑자기 아이폰이 울려 힐끗 화면을 쳐다본다.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싶었더니, 역시나 푸시 알림이다. 이번엔 구글 포토, 잊을만하면 기억 속 저편에 있는 장면들을 나름의 테마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녀석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광고 알림보다는 좀 더 반갑기는 하다. 오늘 보여줄 컬렉션의 테마는 ‘대성당'이란다. ‘내가 무슨 성당을 뭐 얼마나 다녔다고...?’ 의아해하며 잠금을 해제했다. 사진을 한장한장 들여다보니, 박제되어 있던 그때의 추억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첫 사진은 아르헨티나 살타의 ‘Catedral Basílica de Salta’. 볼리비아의 작은 마을에서 국경을 혼자 넘어오며 우여곡절이 있었던 터였다. 배낭을 메고 대충 찾아간 숙소에서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내가 아르헨티나에 있구나’ 실감이 났더랬다. 살타에서 첫 밤이 지나고 맞이한 아침은 일요일이었다. 동네의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괜히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예전에 멕시코 친구 호세가 한국 성당에서는 왜 무릎을 꿇지 않냐며 물어보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성당 밖으로 나와서는 오른쪽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파란색 하늘 아래 분홍색 외벽을 가진 성당이 있었고, 그 앞에는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서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과도 퍽 어울리는 낮이었다.


스페인 톨레도 대성당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이 그다음이었다. 신대륙에서 발견한 ‘El Dorado’, 반짝이는 황금과 탐욕, 경쟁으로 가득 채워져 갔을 구대륙의 성당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마주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부터, 꽃 향기와 종소리로 가득하던 태국 치앙마이의 사찰까지. 다양한 곳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카메라를 들어 촬영했던, 동서양의 성전들의 연이어 등장했다. 사진을 살펴보니 피로한 몸으로 숙소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 작은 가방을 들고 비장하게 문밖으로 나설 때의 기분. 미지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 공기에 미묘하게 섞인 타지의 향기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전해졌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 들었다. 2020년 이후로는 2박 3일간 제주로 향한 것이 마지막이다. 휴가를 내기에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고 차도 없지만,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편한 운동화, 차갑고 낯선 공기를 맡기 위해 가끔은 마스크를 내릴 수 있는 한적한 공간, 누군가의 일상을 관찰하고 포착하는 시선 정도가 당장에 생각나는 준비물이다. 곧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상으로부터 여행을 떠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치 않은 외출 기회가 생겨버렸다. 명동으로 외근을 나갔다가, 카페에 가방을 두고  것이었다. 공유 오피스에서 업무를 보다가, 근처 스타벅스로 자리를 이동해 짧은 미팅을 가졌는데, 그날따라 해당 지점이 영업을 4시에 마감한다는 것이다. 미팅을 마침과 동시에 쫓겨나듯 부랴부랴 왔고, 공유 오피스에서 2시간쯤 일을 마무리 한 후에야 깨달았다. ‘,  가방!’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스타벅스 고객센터로 전화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어제 명동중앙로점에서 오후 4시경 분실물로 접수된 여성 핸드백이 있을까요?’ 다행히 나의 묘사와 비슷한 가방이 접수되었으며, 잘 보관해둘 테니 30일 내로만 찾으러 오라고 한다. 지점으로 전화해서 퀵으로 보내달라고 할까, 잠시 생각했으나 스타벅스에서 직원들이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바리스타가 퀵으로 분실물을 보내준다? 절대 그렇게 해줄 리 없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시간이 되면 찾으러 가야지... 근데 딱히 시간이 될 때가 없는데...’ 생각하며 대학 선배의 결혼식이 있는 삼성역 부근으로 향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2호선 열차를 탔다. 당장 명동으로 향하지 않으면 30일 내로 가방을 찾으러 가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았다. 오랜만에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도 신경 써서 한,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였다.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을 법한 차림새로 명동에 도착했지만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잃어버린 가방 되찾기’ 을지로 입구역에서부터 명동 중심이 되는 거리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이십 대 초반에는 종종 데이트나 친구들과의 만남을 위해 방문하던 곳이었다. 그때는 참 크고 화려하게만 느껴졌던 동네였는데, 걸어가는 양 옆으로 늘어져있는 상가에는 대부분 ‘임대’라는 두 글자가 붙어있었다. 코로나 이전 명동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관광객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보다, 상인과 포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들러 가방을 찾고 그 옆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전날에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성당이 보이는 유리창 근처에서 사진만 찍어볼 뿐이었는데, 이번엔 한번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아주 오래된 돌길 사이에는 아직 어린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한 때 세례까지 받았던 사람으로서 오랜만에 성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안에서는 결혼식이 진행 중이라 초대받은 하객만 입장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맞은편 에스프레소 바로 들어갔다. 안에는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요즘 에스프레소 바가 유행이라더니 (실은 스스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싫지만 별 수 없지...) 명동에 방문한 사람들은 다 여기 모여있었나 보다. 혼자 온 덕분에 바로 스탠딩 테이블 사이 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스탠딩 테이블은 바깥을 향해 나 있었다. 새로운 것만을 좇아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오래되어 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이 보였다. 돌로 지은 성당,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남산, 특유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어주는 서울타워... 이어폰에서는 Ed Patrick의 Barcelona, Bebe 그리고 Ed Sheeran의 Barcelona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제목에 바르셀로나가 들어가는 노래는 왜 나를 설레게 만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가수 이름도 똑같네?’ 생각하며 마스크를 내려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처음 맛보는 음료였다. 그동안 마셔왔던 수많은 커피가 결국은 에스프레소의 다양한 버전이었던 것이겠지만. 신맛과 강한 쓴맛, 비가 그친 후 파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하늘, 쌀쌀한 바람과 커피의 온기로 따뜻해진 코 끝, 구두를 신고 걸어 아픈 발까지. 모두 여행의 그것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와 생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