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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13. 2022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이 하나 되는 감동

파나마 파나마시티

“엄마, 화장실에 물이 내려가!”

파나마시티 공항 화장실에서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기뻐한다. 화장실 변기의 레버를 누르면 물이 쏟아져 내려오며 오물을 씻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서 지내다 오니, 모든 것이 감사하다. ‘쿠바’라는 공간을 다녀왔는데, 마치 우리는 몇십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파나마시티는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시간 여행의 공간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온 듯 높은 빌딩과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가 반가우면서 낯설다.



쿠바에서 바로 페루로 내려가려는데, ‘파나마 운하’가 우리를 끌어당겼다. 오로지 ‘파나마 운하’만 보자며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들어온 파나마다. 스탑오버로 들어오려다, 더 저렴한 다구간 티켓이 있어 서둘러 티켓을 구매했다.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형태의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게 되는데, 이 또한 장거리 장기 여행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이고 재미다. 여행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티켓이나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며 필요한 시기에 거의 맞추어 해결하고 있다. 티켓과 숙소를 검색하고 예매하는 일도 익숙하지 않아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미리 할 수 없는 것이 예약일 가까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고, 시간이 고정되어 버리면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없기에 여행을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파나마시티는 전형적인 현대적 도시 다. 다양한 디자인의 건물들이 즐비하고, 퇴근길의 교통체증도 심하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건물, 거리에서 ‘중남미’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고 가게의 네온사인들이 하나씩 켜진다.


택시가 내려 준 호텔 건너편 식당의 간판에도 하얀 불이 켜져 있다. ‘서울식당’

남편과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울식당’ 간판을 본다. 유난히 한식을 그리워하는 남편과 아이를 위한 나의 서프라이즈 선물이다. 쿠바에서 파나마의 숙소를 검색하다 보니 ‘서울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서울식당’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 체크인을 하자마자 짐을 던져놓고 식당으로 간다.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주인 할머니는 마치 손자에게 하듯,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으신다. 딸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떡볶이요!” 메뉴에도 없는 떡볶이를 흔쾌히 만들어 주신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 온 곳이 식당이 아니라 한국 같다. 텔레비전에서 한국 방송이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고 김치가 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옆에서 진짜 할머니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신다. 할머니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가 그리웠던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는 대하소설 10권으로 부족할 듯하다. “할머니, 내일 저녁에는 김치찌개 먹고 싶어요.”

‘파나마 운하’를 위해 비워놓은 하루다. 남편은 흡연 구역에서 안면을 튼 택시기사에게 가이드를 부탁했다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라며 너스레를 뜬다.

교과서에서 들은 기억만 있는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를 가보자 결정한 것도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게 될 때를 염두에 둔, 다분히 속물적인 동기다. 동기가 무엇이든 파나마 운하가 궁금하긴 하다.


운하를 통과하는 배를 볼 수 있다기에 전망대로 간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컨테이너선이 대서양 방향으로 통과하고 있다. 배가 운하를 통과하는 과정을 놓친 게 아쉽다 생각하던 차에 또 다른 컨테이너선이 대서양 방향에서 들어오고 있다. 시선을 멀리 두니,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한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제법 눈에 띈다.


컨테이너선들은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좁은 수로 안에 들어온 배는 배 양 옆에 설치된 연결 장치를 통해 차와 연결된 뒤, 설치된 레일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작은 차가 거대한 컨테이너선을 끌고 가는 것이다. 수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해수면의 높이를 조절한다. 물의 부력을 이용해 배를 움직인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 관광객들은 너나없이 이러한 과정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우리 역시 다이내믹한 영화를 보듯 눈을 뗄 수가 없다. 감동이 밀려옴과 동시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남편도 나와 같은 감정이라고 한다. 왜 우리는 파나마 운하에 감동을 받지?


서서히 깨달음이 온다. 파나마 운하는 죽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여행 중에 방문한 박물관과 유적지는 대부분은 박제된 역사였다. 기원전 몇 백 년이라는 숫자와 크기에 놀라긴 해도, 그것은 죽은 역사이다. 파나마 운하는 그 시작은 역사 속에 있으나,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현재 진행형의 역사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처음 운하에 도착했을 때, 운하를 통과하는 장면을 놓쳤다고 생각한 것은 운하를 통과하는 배를 보는 관람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를 죽은 유물이라고 오해한 무지의 결과였다.

파나마 운하 전시관에 상영 중인 3D 영화는 파나마 운하의 탄생 배경과 과정, 현재를 보여 준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 완공되어, 1999년 12월 31일까지 미국이 운항 권을 독점적으로 관리해 왔다. 미국이 운하 건설을 위해 파나마의 독립까지 지원했다고 하나, 85년이란 시간 동안 운하를 독점 관리한 것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수에즈 운하’와 더불어 시험에 자주 출제되었기에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던 ‘파나마 운하’는 여행을 통해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육지를 종단하여 만든 수로를 통해 배가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는 현장은 눈으로 보고서도 비현실적이다. 운하가 없던 시절엔 남극 가까이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오가던 길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지만, 풍랑을 만나는 사고도 많아 위험하기도 했다니, 운하는 시간, 돈, 안전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담배 친구인 택시 기사는 파나마 운하를 본 뒤 간단한 시티투어를 제안한다. 우리도 바라던 바라 흔쾌히 OK! 택시 기사는 전문 가이드는 아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가이드를 한다.


미국 은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민지가 파나마라고 한다. 파나마 정부는 이러한 미국 은퇴 이민자를 위해 주택 단지와 레저 시설 등을 그들의 선호에 맞게 조성 중이며, 은퇴 이민자를 위한 각종 특혜를 내놓고 있다. 파나마는 비단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적당한 이민지를 찾기 위해 찾는 나라 중 하나이다. 실제로 우리 가족을 보고, 이민 투어 중이냐고 물어본 사람도 있다. 파나마 운하 건설 과정에서 콜롬비아로부터의 파나마 독립을 지원했기에 미국과 파나마의 관계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도 파나마에서 입국하는 비행기에 대한 검색이 다른 나라 비행기에 비해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남미의 다른 나라 장사꾼들이 파나마를 경유해 미국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남미 원주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시티투어를 마친 뒤, 구시가지에 우리를 내려주고 택시는 떠났다. 유럽풍의 집들이 있고, 성당과 작은 광장이 있는 마을이다. 기념품 가게와 몇몇 프랜차이즈 팬시점, 레스토랑이 보인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보이는 공터가 펼쳐져있다. 그곳에 초라할 만큼 작은 프리마켓이 열려 있다. 원주민들이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인 그들의 모습은 비까지 내려 더 안쓰러워 보인다.


제 살을 도려내어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는 길을 만들고, 그 길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이 만나 섞여 하나가 된 파나마 운하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정지화면처럼 느린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배를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옮겨놓았다. 하늘의 해도 움직임은 보이지 않으나 빌딩 숲 너머로 넘어가 버렸다. 내 아이도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어느새 나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변화와 성장은 한 번의 큰 움직임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 쉼 없이 지속될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깨달음을 파나마 운하를 통해 배운다. 파나마 운하는 이 번 한 번의 긴 여행으로 너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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