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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mpo Primo Aug 23. 2019

나의 첫 페미니즘 책

<남성성과 젠더>를 읽고, 2013년에 씀

 신문의 사회란은 시도때도 없이 심란한다. 가족을 상대로 한 반인륜 범죄부터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한 소아성애 범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사건들을 보고 듣자면 종류와 범위도 다양한 것 같다. 그 중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역시 성범죄이다. 특히나 언제부턴가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미디어에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성들은 물론, 딸이나 여성 가족을 둔 남성들까지 '이런 나라에서 여자가 마음 편히 살 수 있겠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의 공포감 조성을 위한 것이든 실제로 성범죄의 빈도가 높아진 것이든, 어쨌든 우리나라는 더이상 여성이 마음 놓고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모순되게 신문의 다른 면에서는 나날이 높아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012년에는 근소한 차이지만 사상 최초로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62.9%)이 남성의 참가율을(62.6%) 앞질렀고(2013.3.7, MBC뉴스), 사법고시에서는 506명 중 211명인 41.7%가 여성으로, 여성의 사법고시 합격률 역시 최고점을 찍었다(2012.11.22, 서울신문). 물론 아직까지는 여성이 30대, 40대가 될 때 까지 근속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며 이를 '유리천장'이라 빗대어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추세라면 여성의 사회 생활에 대한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대조되는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봐도 좋을까?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슈는 더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가부장적인 배경이 강한 곳이다.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칠거지악'이 존재해 왔으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고, "여자 팔자는 뒤옹박 팔자"라는 교훈(...?)을 담은 콩쥐팥쥐 이야기가 어머니에서 아이에게 구전되었다. 이런 사회적 풍토를 바탕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제한되었으며 광복 이후 신여성의 등장은 종종 비웃음거리가 되어 왔다. 나는 아직 이와 관계된 이슈가 적절히 공론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여성은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사상이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퍼 우먼'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단 여성의 사회 활동의 이면에는 아무 걸림돌이나 제약이 없는 것일까? 이런 자문을 하던 중 우연히 자음과 모음 리퍼브북 판매처에서 발견한 책이 <남성성과 젠더>였다. 


  이 책에서는 성을 sex와 gender로 나누어 우리 사회를 진단한다. sex는 호르몬이나 신체 구조 등 생물학적인 요소로 구분하는 성이며 gender는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구분하는 성이다. 우리나라는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가부장 사회이며, 가부장 사회는 남성과 여성의 성 구분에 특히 엄격하다.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도 남자는 어때야 하며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사고를 무의식 중에 집어넣는다. 사실 성역할에 대한 관념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임의적이며 일관적이지 않는데, 일부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이들은 마치 남성성과 여성성이 각각의 성에 귀결되는 필수적 요소인 것 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는 분명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은 '분업'이 아니라 여성의 이중노동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공/사 영역 전반에 걸쳐 일하지만, 모든 남성이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며 임금 노동 시장에서 밀려난 남성들은 사적영역에서 노동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욱 강하다.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될 수록 이 노동은 남성과 분담되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 인종, 나이 등의 위계에 따라 여성들 내부에서 '전가'된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가부장제의 쇠퇴는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본문에서 발췌한 위 글은 사회의 변화와 기존의 성가치관이 맞물리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다. 여성은 사회에 나가도 가정의 일을 해야 하며, 만약 사정의 여의치 않다면 가정부나 시어머니, 친정 어머니 같은 다른 여성이 그 일을 대신한다.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여성들 내부에서 전가되는 이중노동이 바로 이런 것이다. 요즘 <아빠! 어디가?>라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고, 나도 즐겁게 보고 있다. 아버지가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포맷의 프로그램인데, 종종 한 출연자를 빗대어 '딸바보'라는 용어가 언급된다. 딸을 애지중지하고 예뻐하는 아버지를 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딸을 애지중지하고 예뻐하는 대상이 어머니였다면 그 어머니에게도 '딸바보'라는 말이 붙었을까?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아는 '원래' 여성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대립이다. 최근 여성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꼽는다. 이전에도 여러 인사들에 의해 거세 공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언급되어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모든 성범죄와 대립의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보는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 영향이 없다고 볼 순 없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남자들 지위가 예전 같지 않다"라는 말 역시,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회자되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실제로 버릇이 없는지'의 경우처럼 '남성의 지위가 실제로 낮아졌는지'는 판단 불가능한 문제다. 과거 남성과 현재 남성의 삶은 비교, 계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언설은 남성 우월주의가 인간사의 진리라는 당위를 전제하고 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지위는 언제나 무조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비정상적, 문제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상당 부분에 공감하면서 봤는데, 우리나라는 여권 신장의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가 그랬고, 또 지금도 그렇다. 이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가 골자인데, 나는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남성과 여성이기 이전에 본인을 스스로 존중받을 만한 인격체로 성장시켜야 한다. 즉,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은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깎아 내리지 말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함께 상생해야 하며, 여성은 남성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바라며 의지해서는 안 된다. 여성이라고 하여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한다면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이상적인 형태의 기능주의적 사고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테두리라고 생각한다.  






2013년은 읽고 쓰는 것에 아주 재미를 가졌던 시기라, 이때 내가 썼던 글을 보면 재밌다.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싶어서 재밌다.)


이 글은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책으로 접하고 남긴 글이다. 당시 나는 여러 기사들을 보며 미묘하게 '아... 뭔가 이건 좀...?'이라는 생각을 막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기점으로 sex와 gender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젠더 권력이란 무엇인지, 내가 실생활에서 겪고 있는 젠더 불평등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사회에서는 어떤지 등을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그래서 <남성성과 젠더>는 나에게 고마운 책으로 남아 있다.


정말 씁쓸한 것은, 6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회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정치권과 미디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좋은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후자는 좋은 것이 아니냐,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권과 관련된 문제를 도구로 사용했을 때의 파장은 크다고 생각한다. '도구'로 사용되다 버려졌을 때 오는 백래시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저 시대보다는 '페미니즘'이 보편적인 대화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언급이든, 긍정적인 언급이든, 점심 식사를 하며 회사 동료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고, 친구와 맥주 한잔하며 무심코 넘겼던 차별적 시선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관점과 방향성을 가지고 젠더 권력의 불평등을 줄여나갈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은 어떤 행동 지침이 아닌 인권과 관련된 이슈이고 가치관이니,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가지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나만의 페미니즘'을 마음에 품고, 그 가치관을 지켜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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