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보이스 코칭과 스피치 수업까지 하고 있다. 나도 여기까지 일을 껴안고 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시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알고 보니 아예 '워케이션'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work(일) + vacation(휴가) =Workation(워케이션)
휴가지에서의 업무를 인정하는 근무형태를 말한다고 하는데 딱 지금 나의 제주 한 달 살기가 그렇다. 물론 나의 처지는 회사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1인 기업이나 다름없는 나로서는 제주 한 달 워케이션이라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수입도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고 한 달 후 상황도 보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냈다. 놀멍 쉬멍 일도 하멍 지내는 나만의 가을 한 달 워케이션.
나 홀로 한 달 살기에 필요한 용기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강의를 거절할 용기 감히! 일을 안 할 용기. 즉 돈을 조금만 버는 용기 말이다. 월세는 한 달 쉬기가 안되는데도 말이다.
둘째는 아내와 엄마의 부재를 통해 불편을 겪게 될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할 용기.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남편도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19세를 넘겼지 않은가. 일상을 살아내는 독립성이 필요한 지당한 나이니까 크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세 번째는 고요함에 대처할 용기다. 나 홀로 한 달 살기를 간다고 하면 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외롭지 않냐는 것'. 하지만 우리가 같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았던가. 인간의 외로움은 근본적인 문제다. 차라리 혼자 있을 때 밀도 있게 외로움을 버티고 누리는 것을 통해 일상의 그것은 더 견디기 쉬워진다.
온라인 클래스 스피치 코칭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흔들어본다.
'여기가 어디야?'묻고
'아 여기 제주'라고 자답한다.
하지만 대답은 애초에 필요 없었다. 그저 문만 밀어젖히면 되니까. 그러면 제주의 동쪽 바다가 나의 가슴을 무장해제시키며 사정없이 밀려들어오니까.
순간 깜짝 놀란다. 눈물도 찔끔 난다. 반짝반짝 에메랄드빛 위엄 있게 넘실대는 파도와 또 연거푸 쉬지 않고 넘나드는 파도를 보면서. 내 마음의 경계가 무너진다.
한달살기 첫 숙소 월정리 해난디아장 팬션의 창문뷰와 테라스 뷰
나의 첫 번째 숙소인 제주 동부 해안도로가에 있는 해난디아장 펜션은 소박했지만 바다를 종일 품에 안을 수 있다. 후훗. 몇 시간이라도 앉아있을 것 같지만 다시 좀이 쑤셔온다. 나는 선크림을 찍어 바르고 숙소를 나선다. 맹렬히 맛집도 명소도 검색할 필요가 없으니 급할 것이 없다.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된다. 우연히 들어갔는데 인터넷에서 극찬하는 맛집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연신 좋아서 실룩되는 표정으로 '달이 머무는 곳'이라는 월정리 마을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서두를 것 없는 시간 속에 나는 느긋하게 걷고 또 걷는다.
그런데 순간 내가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너 괜찮니? 네 마음 괜찮니?'
'응. 점 점 괜찮아져.'
'너 잘 가고 있는 거지?'
'응. 유명 한자 아니지만, 이제 적어도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니니. 좋아 난 이런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니까 크게 실망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랑하는 네가 좋아 나는. '
'고맙다 나야. 수고했다. 나야. 계속 귀한 인생 즐기고 나눠보자 나야.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을까?'
나 홀로 여행의 최대 장점은 내가 나에게 계속 말을 걸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만 몰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생각이 툭툭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운이 좋으면 일과 삶에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라 적어두기도 한다.
하하 말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까 당연한 것인지도.
그 밀도가 얼마나 진한지.
얼마나 좋은지.
나는 나를 만나러 왔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러 왔다.
먼저 나와의 대화를 충분히 한 후에 만족감이 들면 그때 가서 다른 이들의 삶이 궁금해도 괜찮다.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까. 2박 3일도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이라는 꽉 찬 밀도의 시간이 내게 남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