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은 타고 싶다고 타는게 아니다.

직장적인, 너무나 직장적인 2편

by 서안
"그냥 모른 척하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인사 명령 내겠습니다.
못 이기는 척 오시면 됩니다."


토하도록 일이 쌓여있는 오후 사내 권력과 가까운 부서 팀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또 일을 던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왔다.

모두가 같은 팀이지만 엄연히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정해준 것도 아니지만 사내 권력의 중심부에 가까울수록 지시에 익숙해져갔다.

Output을 만들어 내는 팀일 수록 더욱 아래로 떨어지는 기현상을 경험했다.

Ouput과 Implication은 항상 함께였고, Risk와 Mitigation을 함께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하위 조직의 숙명이었다.


비어있는 중역 사무실에서 보자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갑게 맞아준다.

더욱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웃음은 그 웃음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고 한다.

자기와 함께 일을 해보자고 한다.

뭔가 모를 미묘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인정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하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어떻하지?

미치도록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던져놓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리고 갈 자신이 있냐고 거만하게 물었다.

당당하게 보이고 싶은 행동이 거만하게 표출되었다.

가서 어떤 대우를 받더라도 떠나는 순간까지 인정받아 가는 모습이고 싶었다.

당당하고 인정받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인사 명령 내겠습니다. 못 이기는 척 오시면 됩니다."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은 채 둘의 만남은 단 몇 마디로 끝이났다.



그 날 이후, 조용히 떠날 준비를 했다.

민폐는 끼치지 않아야 했기에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일도 사람도.

가족처럼 지내는 동료라도 남의 쓰레기를 대신 치워야 하는 것은 싫은 일이다.

나의 쓰레기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진행되던 어느 날 조직의 최종보스가 나를 불렀다.

못 보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갈 생각 하지 마라고 한다.

알겠다고만 하고 돌아섰다.

그의 눈에 섭섭함이 느껴졌다.


그 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마시자는 요청이 쇄도했다.

데려가겠다는 쪽과 못 보내겠다는 쪽

예상 외로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전세는 점점 기우는 듯 했다.

역시 권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위에서 찍어누르면 답이 없다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한다.

쓰레기 같은 일을 모두 던져버릴 수 있어 홀가분하면서도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배신자라고 놀려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최종 보스가 다시 나를 불렀다.

못 보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회사의 탑매니지먼트를 만나 직접 못 보내겠다고 했다고 한다.

가서 일을 하라고 한다.

마음 잡고 다시 일을 하라고 한다.

나의 의견은 필요하지 않은 듯 했다.

조용히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왔다.


이렇게 모진 풍파가 지나가는 듯 했다.




"전 선배가 그 분의 오른팔이라고 들었어요."

"오른팔이면 잘라 버리고 싶네."


줄이라는 것은 잡으려고 한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 줄에 서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나는 그 줄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기진맥진하여 공항에서 돌아갈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의자에 구겨져 있던 나에게 후배가 말했다.

"전 선배가 그 분의 오른팔이라고 들었어요"

오른팔이면 잘라버리고 싶다고 했다.

지쳐있는 와중에도 후배는 내 말이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출장을 동행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오른팔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을 해줘서였는지 그 날이후 지금까지 이 후배와는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그 줄은 일치감치 떨어져 버렸다.

나는 그 줄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 줄을 잡고 있지 않았다고 말 할 기회조차 없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놀려대며 위로해 주었다.

그러게 열심히 잘 하지 그랬냐면서.




모진 풍파가 지나갔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했다.

한 쪽은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서 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권력을 찾아 스스로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경험은 중요하다.

줄에서 끊어져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담담하게 맞이했다.

애써 아닌 척하지도 않았다.

이제 남은 직장생활 꼬였다는 놀림도 농담을 받아줄 수 있는 아량이 생겼다.

꼬인 생활을 하면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살아가고 있다.


나를 잡은 최종보스는 회사를 떠나기 전 미안하다고 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미안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줄이라는 것은 잡고 싶다고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잡기 싫다고 엮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꼬여버린 이 줄을 풀어보기 위해 변방에서 숨어지내보기도 했다.

발악을 하며 짖어보기도 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내맡겨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꼬여버린 줄은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꼬여버린 줄은 풀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풀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었다.

꼬인 것은 꼬였다고 인정했어야 하는데,

꼬인 것을 풀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에 나를 갉아먹어버렸다.


꼬인 것을 풀고 다시 깨끗하게 시작하겠다는 나의 미숙함이.

나를 갉아먹어버렸다.





1. 불치병임을 알고도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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