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적인, 너무나 직장적인 1편
출근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나 자신도 확실히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어느덧 몸은 사무실의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일상이 그대로였다.
망할... 나의 껍데기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고, 메일을 회신하고 있었다.
죽을 병에 걸렸을 수도 있는데 타인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출근을 했고, 일을 하고 있다.
출근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나 자신도 확실히 답을 하지 못했다.
2주일 전이었다.
꼬여버릴대로 꼬여버린 일을 풀기 위해 미국 출장 중이었다.
호텔을 나서 출근하기 전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로 나는 처음 들어보는 병명을 들었다.
아니라고 애써 외면했다. 그럴리 없다고 태연한 척 했다.
귀국하자마자 병원부터 수소문했다.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이 유명하다고 한다. 전화를 하니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준다.
전화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약간의 짜증과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어투가 섞인 채로 더 빨리는 안된다고 한다.
1년 동안 해야 할 통화를 1주일 동안 다 해버릴 기세로 전화를 해댔다.
결국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의 진료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버티면 5년 이상도 살 수 있다고 하니, 저 아이들 철들때까지만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잠든 아이들을 보는 것 외에 당장 해 줄 수 있는게 없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걱정은 내 속에서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괴물을 나를 잡아먹을 듯이 몰아세웠다.
아무 일 없는 척 집을 나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미치도록 평범한 이 일상이 이제 끝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시작해 서글픈 고백으로 끝을 맺었다.
친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목소리를 들었으면 되었다고 했다. 털어놓아서 속이 풀렸다고 했다.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눈을 뜬 다음 날 아침
난 다시 출근을 했다.
출근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나 자신도 확실히 답을 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가는 날은 서글프도록 날이 좋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지 최대한 담담히 받아들이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삶의 여한이 없을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신호 대기 중에 문득 이 날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냥 보통의 교차로 사진이다. 운전석에 앉아 게으르게 찍은...
좋아하는 이 차를 타는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
병원까지 아버지가 오셨다.
검사를 받으러 여기저기 들릴 때마다 모두 아버지가 환자라고 착각을 한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가끔씩 아닐 거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이신다.
지루한 검사가 끝났다.
주변의 시간이 멈춰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 나의 시간만 멈춰서 있는 느낌이다. 소란스럽고 분주한 주변의 움직임이 의식되지 않는다.
죄를 지어 구형을 받기 전의 기분이 이럴까?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의사 앞에서 나에게 떨어질 형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던 내 앞의 의사의 입이 떨어졌다.
오진인것 같다고 한다.
땅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황홀하게 땅 속으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뭐가 고마운지 몰랐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세상에 고마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짐짓 대범한척 본인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셨다며 큰소리치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한 드라이브였다.
캄캄한 도로를 내달리면서 삶의 갱신을 만끽했다.
뒷바퀴에 걸리는 느낌, 코너에서 밀리는 느낌, 핸들을 통해 느껴지는 노면의 감촉,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확실하게 각인하였다. 아니 각인되었다.
나의 죽음에 울어 줄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글이 아닌 체험으로 깨달았다.
누구나 잃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잃어버리기 전에는 잃을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었다.
다시 출근한 사무실은 생경하였다.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내 책상, 내 노트북, 내 슬리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나는 무엇때문에 저 분주함 속에 휩쓸려 살아왔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음을 짊어졌을 때는 일을 할 수 있었건만, 죽음을 내려놓은 후에 도리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순간순간을 아끼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로 읽어 아는 것과 사무치게 느끼는 것이 다름을 알게되었다.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나의 불치병 스토리는 상투적인 교훈 하나만을 남겨두고 끝이 났다.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