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
늦은 밤, 어둠이 고요히 깔린 작은 골목. 조명 하나 없는 건물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유일한 창문이 보인다. 그 창문 너머에 타로 상담사가 앉아 있다. 그녀는 길게 풀어놓은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며, 손끝으로 천천히 타로 카드 덱을 섞는다. 카드가 차분히 그녀의 손에서 섞일 때마다 공간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문턱에 잠시 멈춘 그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주저하는 듯하다. 30대 중반, 회사원다운 모습이지만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상담사 앞 의자에 앉는다.
“운명이 바뀔 수 있나요?”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마치 한숨처럼 들렸다. 상담사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지요." 조용한 방 안에서 카드 섞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상담사는 천천히 손을 멈추고 카드를 펼쳤다. 카드는 반짝이며 테이블 위에 놓였고, 첫 번째 카드가 드러났다. ‘운명의 수레바퀴’. “운명은 언제나 움직입니다.” 상담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건 당신의 선택뿐이에요.” 남자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택이요? 나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상담사는 잠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지요.” 그녀는 다시 카드를 뒤집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매달린 남자’. “당신은 오랫동안 멈춰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이죠. 하지만 당신을 가둔 건 시간도, 운명도 아니에요. 당신 자신이에요.”
남자는 잠시 상담사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방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상담사는 그에게 말없이 시간을 주었다. 긴 침묵 끝에,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피곤함이 묻어있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서 9시에 일을 시작하죠. 회사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좁은 책상에 앉아… 그저 컴퓨터를 두드리고, 상사에게 지시를 받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천천히 쥐어짜듯 말을 이어갔다. "매일이 똑같아요. 뭔가 새로운 걸 기대해도 그건 기대일 뿐,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사무실 안에 있으면 시간이 그냥 멈춘 것 같아요. 점심시간도, 회의 시간도, 퇴근 시간도, 그저 반복될 뿐이에요. 그래서… 뭔가 바뀌길 바랐어요. 승진도, 기회도, 그리고… 삶도요."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로는 담담하려 했지만, 그 안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는 작게 웃었다. "3년 전쯤이었죠.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게 다를 거라 생각했어요. 그녀와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죠." 그의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결국… 나는 그녀와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어요. 나는 일 때문에 점점 더 멀어졌고, 그녀는 내게 실망했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어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계속 미뤘어요. 결국 그녀도 떠나고, 내 삶도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고, 방 안은 다시 어두운 침묵에 잠겼다. 남자의 손은 이제 꽉 쥐어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삶이…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진 게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결국 결과는 똑같아요. 직장에서도 변하지 않고, 내 인간관계도 그대로이고… 그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요."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힘겹게 말끝을 맺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무력감에 지친 상태였다. 그는 한참 동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담사의 차분한 시선이 그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래서…"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온 거예요. 타로가 제 운명을 바꿔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남자는 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방 안의 정적이 한층 더 깊어졌고, 그가 드디어 자신의 무력감을 뱉어내자 그의 어깨는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갇혀 버렸고, 직장도, 사랑도, 인생 자체가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그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상담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고통받는 이유는 멈춘 시간 때문이 아니에요. 자신이 그 시간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지.” 그녀는 카드를 뒤집는다. ‘죽음.’ “끝남은 곧 새로운 시작이죠. 하지만 그 시작은 스스로가 만들어야 해요. 당신이 새로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한,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당신은 같은 지점에 서 있을 겁니다.” 상담사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마지막으로 드러난 카드는 ‘마술사’였다. 상담사는 천천히 카드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을 꺼냈다. "마술사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예요. 하지만 그 힘은 남이 대신 써줄 수 없죠. 당신 스스로 그 힘을 깨워야 합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드를 바라봤다. 남자는 상담사의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 그 힘을 깨워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며 맴돌았다. 그는 여전히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기대했던 답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스스로 운명을 바꾼다니…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남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동안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닌 외부의 문제라고 믿었다. 운명, 시간, 환경이 자신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상담사의 말은 그 믿음을 깨트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지난 몇 년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똑같은 일상, 반복되는 업무, 멈춰버린 인간관계. 그는 마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강의 흐름을 바꾸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바로 문제였어...’ 그는 조용히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거군요.” 남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책상 위를 짚었다. 자신의 삶을 멈추게 한 것도,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도 결국 자신이라는 생각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는 상담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운명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진정으로 와닿았다. “내가…” 남자는 속삭였다. “내가 멈춘 거였어요.” 그 순간,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얽매여 있던 무언가가 풀리듯 그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그의 몸은 이제 더 이상 그가 지니고 있던 무거운 짐에 눌리지 않았다. 남자는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남자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변화를 기다렸지만, 결국 바꾸지 않았던 건 나였어요. 내가 선택을 해야만 내 삶도 바뀌겠죠.” 상담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남자는 그 미소를 보며, 그녀가 마치 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순간, 그는 그녀에 대해 묘한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하지만 그는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느낄 때, 그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상담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 듯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카드를 살며시 집어 들었다. ‘마술사’ 카드가 빛을 받으며 은은하게 빛났다. 그녀는 조용히 카드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모두가 자신이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 힘은 스스로에게 있지…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지.” 그때, 문이 다시 살짝 흔들리며 남자가 떠났던 순간의 여운을 남겼다. 상담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창밖에 비친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짧은 번뜩임이 스쳤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달빛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잠시 흐릿하게 일렁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