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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Feb 24. 2022

붉은 연아, 안녕.

 걸을 때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가을날에 학교를 오르다가 마주친 나무 꼭대기에 걸린 연. 붉은 종이 연이었다. 그 꼬리가 바람에 사스락 사스락 낙엽 소리를 내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여웠다. 그 연을 마주할 때면 그 연에게 무엇이든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지긋이 바라보듯 그 연도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듯한 느낌 말이다. 그날부터 연에게 말했다. 연에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 옆에 개나리도 듣고 나무들도 듣고 잠든 겨울 땅도 듣곤 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나의 말을 들으면서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그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주는 땅의 고요한 미소가 좋았다. 그래서 걸을 때면 나는 미소가 난다. 내가 속삭였던 모든 말들이 내 걸음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듯해서 웃음 짓게 된다. 그리고 그 미소가 떨어져 나가고 낙엽처럼, 낡디 낡은 날개를 두른 나방처럼 날아오르면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눈으로 그것을 배웅한다.

 "안녕" 나무에게 속삭였다. 다른 아이들의 모진 말을 듣고 온 터라 눈이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이 기억난다. 바람이 일어나 개나리 사이를 달려 나갔다. 그러자 개나리들이 덩굴로 된 손을 뻗으며 내게 "안녕, 안녕!" 말했다. 그들의 꽃잎이 떨궈 노란 조각배처럼 하늘 위를 떠내려갔다. 사스스스! 그들의 손짓이 파란 하늘 위를 가던 구름의 길을 흐리고 구름은 길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놀라움에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봄은 그렇게 작은 선물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크고 나서 나는 그 연을 찾아오지 않았다. 한동안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그곳에는 연을 쥐고 있던 나무만 서 있었다. 나는 그 붉은 연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을 만나지 못한 지 일주일 되던 날밤에 꿈을 꾸었다. 나는 다시 그러쥔 손만 허공에 뻗은 나무 앞에 서 있었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내 눈이 붉게 물들었고 눈물이 차갑게 볼 위로 내려갔다. "안녕" 내가 작별했다. 이미 떠나버린 연에게, 그리고 남겨진 침묵하는 것들에게 말이다. 그 순간 바람이 일어나 하늘 사이를 뛰어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발걸음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그 파랗게 펼쳐진 하늘 위에 붉은 점 하나가 보였다. 붉은 연이었다. 그 아래로 내 작별의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치면서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하였다.

 잃은 것들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잃기 전에는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잃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부서지고 그 마음 조각은 온데간데없는데 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시간은 걸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무수한 걸음을 걸은 시간 속에서 나는 또다시 붉은 연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여름 방학이었다. 천문대에 갔다. 거대한 망원경과 그 앞에 놓인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는 그 장소는 아름다웠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 그 장소에겐 아침이었고 어둠이 밝아오는 햇빛이었다. 그 장소에서 나는 붉은 별을 보았다. 그 별이 어찌나 나의 붉은 연을 닮았던지 나는 반갑다고 속삭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대답했다. 내가 놀라서 돌아보자 또 다른 나의 붉은 연이 그 붉은 별 아래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한다. 붉은 연은 나의 속삭임을 바람 삼고 멀리멀리 날아갔을 거라고 말이다. 지금쯤 어딘가 아름다운 곳에서 날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아직도 내 걸음에 미소가 피고 아직도 붉은 눈이 얼굴 위에 드리울 때면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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