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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마음을 달래 주는, 검은깨 타락죽



며칠 입술 끝부분이 발그스름해지더니 이내 보기 싫은 수포가 올라왔다.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몸의 신호였다. 의사 선생님은 무조건 절대 안정 취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필자에게 강조했다. 그렇게 구정 연휴 내내 건강 회복을 위해 집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어차피 건강한 이들도 집에 머물러야 하는 시국이었기에 억울하지는 않았으나, 휴식을 취하는 몸과는 다르게 마음은 여전히 부대끼는 것이 문제였다. 아마도 업무와 휴식의 경계가 희미해진 일상이 오랜 되다 보니, 갑작스럽게 주어진 쉬는 시간에 마음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시속 300km로 빠르게 달리던 몸은 피곤하다며 잠시 주저앉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못해 여기 저기 부딪히고 있었다.      




그 다음 주,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음을 매섭게 알려 주듯 갑작스럽게 눈이 내렸다. 입술 주위에 뽀얗게 다시 올라온 새살을 확인하며, 필자는 집 근처 사찰을 찾았다. 연휴 내내 집에서만 머물렀던 터라 답답하기도 했고, 눈이 쌓인 사찰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소복하게 쌓일 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사찰이 하얗게 물들을 만큼 딱 알맞을 정도로 눈이 내렸다. 금세 녹아버릴 눈을 부지런히 밟으며 사찰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던 필자는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음을 느꼈다.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집에 돌아와 따듯한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 사찰에 다녀왔으니 기왕이면 사찰 음식을 먹으면 좋겠다 싶어, 고민하다가 타락죽을 생각해냈다. 타락(駝酪)은 우유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물과 우유를 반씩 넣어 만든 타락죽은 대표적인 사찰 음식 중 하나인데, 일반 죽과는 또 다른 고소하고 부드러운 매력이 있다. 죽은 금방 만들 수 있고, 묽어서 부담 없이 먹기 좋으니 환자식으로도 제격이다. 환자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주간 힘들었을 몸과 마음에게 위로의 의미로 ‘검은깨 타락죽’을 선물하기로 했다.     


필요한 재료

검은깨 5큰술, 불린 쌀 150g, 찹쌀가루 150g, 우유 200ml, 물 300ml, 소금 또는 설탕      


만드는 과정

1. 검은 깨는 곱게 갈아서 준비한다.

2. 쌀은 30분 이상 물에 불려 둔다.

3. 물, 찹쌀가루를 냄비에 넣고 멍울 없이 풀어 주면서 섞다가 불린 쌀을 넣고 저어가며 끓인다. (중간불)

4. 쌀이 퍼지고 농도가 걸쭉해지기 시작하면 우유를 약간씩 부어 준다,

5. 검은깨 가루를 넣고 잘 풀어 가며 소금 또는 설탕으로 간을 한다.          



믹서기가 고장 난 터라 손절구를 사용해 수작업으로 검은깨를 갈았다. 드륵드륵 힘을 주어 갈면서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끈질기게 자리 잡고 있었던 근심과 상념도 함께 갈아 주었다. 냄비에서 물과 찹쌀가루가 멍울지지 않도록 풀어 주는데, 이게 도대체 언제 다 풀리나 싶을 때쯤 따듯하게 데워진 물 안에서 찹쌀가루 덩어리들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은 일들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탁 풀어지듯이.    

 

다음은 쌀을 넣고 우유를 조금씩 부어주며 죽이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계속해서 저어줘야 한다. 타락죽이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는데,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메뉴였다. 조선왕조 때 궁중에서 먹었던 음식이라니 과연 보통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음식이 아니구나 싶다. 이런 생각도 잠시, 쌀이 뭉근하게 퍼질 때까지 하염없이 젓는다. 팔이 아픈 것보다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더 크다. 마지막에 검은깨 가루를 넣어 하얬던 죽이 회색으로 변하는 것을 볼 때 즈음에는, 고소한 검은깨 향만이 필자의 후각을 자극한다.      


한 입 떠먹으니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밥알과 부드러운 우유 그리고 검은깨가 꽤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서양에는 크림과 쌀로 만든 리조또가 있다면 한국에는 자랑스러운 타락죽이 있다. 몇 번 씹지 않아도 홀랑홀랑 넘길 수 있는 죽이어서 그런지 가뿐하게 한 그릇을 비워 낸다. 든든한 포만감과 함께 좋은 영양소가 몸 전체에 온화하게 흡수되는 기분이다. 마음까지 덩달아 평화로워진다. 잠깐이라도 쉬는 법을 몰라 우왕좌왕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니, 이제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히 회복된 느낌이다.     



어쩌면 휴식이란 몸과 마음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취해 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의사 선생님의 경고에 가까웠던 신신당부에 따라 절대 안정을 취하니 피곤했던 신체는 금방 기력을 찾았다. 토라지듯 급격하게 저하된 면역력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은 몸을 돌보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마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보다 어떤 행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서서히 정리가 됐다. 침대에 누워만 있던 연휴 내내 귀를 울리는 잡음으로 가득했던 필자의 마음이, 사찰을 걷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요리를 하면서 조용해진 것처럼. 이를 보면 때때로 소란스러운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조용한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한 몰입이 아닐는지.      




* '쿡앤셰프' 사이트 <이주현 셰프의 인생 레시피>에 연재중인 칼럼으로,  2월 17에 발행된 '4번째 인생 레시피_검은깨 타락죽' 편 입니다. (요리, 사진, 글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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