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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낚는 어부 Jan 04. 2024

항구 뒤편에서 만난 노인

어촌일상 이야기

때 아닌 겨울비를 머금은 얼음 알갱이가 내리다가, 하염없이 맑아진 날이었다. 파도도 평소처럼 다시 잔잔해졌다.


바닷가에 살면서 궂은 날씨를 가장 실감 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갈매기들 덕분이다.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날 만큼 파도가 휘몰아칠 때면, 갈매기떼들은 해변에 한껏 웅크리고 죽은 듯이 앉아있다. 그 무리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베이지색 모래를 덮어 버리는 그 칙칙한 군집들은 머리 위의 먹구름색과 꼭 닮았다. 흰색과 회색의 엄청난 무더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더라도,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날이 다시 맑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대단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 흘린 것을 찾아 배를 채우러 갔을 것이다. 동네 코흘리개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든, 낚시꾼이 흘린 반토막난 갯지렁이든, 부둣가 그물에서 흘린 잔챙이 물고기든. 사는 곳만  다를 뿐,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부리 속에 욱여넣는 것은 도시의 비둘기와 다를 바 없다.




그 날도 그 많던 갈매기들이 잘 안 보이는 날이었다. 축축한 겨울비를 피해 집 안에만 있다 보니, 거실에 가득한 섬유유연제 냄새마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드라이브 겸 산책을 나갔다.


바닷가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낚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대부분 그냥 보고 지나칠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장소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지만, 아주 가끔은 도대체 저기는 어떻게 찾아간 것인지 미스터리 한 장소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도 보게 된다.


웬만해서는 그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가 시간 날 때마다 기어코 가보는 편이다. 비밀 낚시 포인트보다는 특이한 산책코스를 찾기 위함이다. 그때 찾은 이곳도 지난가을에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꼭 2달 만에 찾았다. 이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도 물론 없거니와, 딱히 이렇다 할 명칭도 없는 그런 곳이다.



주문진 항구 뒤편. 내가 임시로 지은 이름이다. 뭔가 특징이라도 있으면 멋있는 수식어라도 붙여줄 텐데 주변에 녹슨 배 한 두 척 말고는 도저히 뽐낼만한 것이 없다. 그래도 하나를 꼭 꼽아 보자면 헬기장으로 쓰여도 이상하지 않을 넓은 광장정도?

 

산책을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밋밋하기 그지없는 장소. 그럼에도 뚜렷한 이유 없이 열량을 소모하면서까지 이곳에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래서일까. 머릿속까지 흐리멍덩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 것은 홀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노인이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장면이었겠지만, 단조로움 속에서는 그마저도 특별하게 보였나 보다. 지팡이에 기댄 채, 의자에 앉아 바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제법 추운 날씨인데도 나와 계신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이곳에.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소가 주문진 항구 뒤편인 만큼 이른 새벽부터 저 멀리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시간대도 점심 무렵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배를 정박하고 오늘 잡은 고기들을 내린 뒤,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와 함께 뜨끈한 점심밥을 먹는 부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왠지 대화 없이 무뚝뚝한 공기가 흐르지만 이내 냄비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욱한 연기로 인해 따뜻해지는 그런 분위기가 떠올랐다.


아니면, 다른 이유는 또 무엇이 있을까. 한껏 굽어진 등과 대비되는 올곧은 시선이 보였다. 물결에 반사되는 햇살에 눈을 찌푸릴 만도 한데, 아랑곳하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 너머를 보고 계신다. 어쩌면 억센 겨울 햇빛보다도 더욱 찬란했던 젊은 날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굵은 마디의 손가락, 검게 그을린 피부,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듯한 하얀 머리칼이 말해주는 것 같다.


「나도 한 때 주문진항에서 숱하게 배를 타고 저 방파제를 드나들었었다고. 요새는 오징어가 워낙 안 잡혀서 큰일이지만, 내가 한창 다닐 때는 집집마다 말린 오징어들이 줄줄이 있었다고. 그때는 정말 진짜 우스갯소리로 등대마을 똥개들은 전부 입에 만 원짜리 지폐 하나씩 물고 다닐 정도였다고.」




내가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려던 때도, 노인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 여쭤보고 싶지는 않았다. 말 없는 그 노인은 이미 나에게 선명한 장면들을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3년 정도밖에 이곳에서 살지 않았지만, 지금보다 10배 정도 시간이 더 흘러 나도 그 노인처럼 되어 항구 뒤편 광장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지, 그런 나를 바라보는 젊은이가 있다면 또 무슨 생각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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