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 이어진 따뜻한 네트워크
연말이 되어 아내와 함께 커피공방을 찾았다. 커피공방 사장님께서 차 한잔 마시러 오라고 아내에게 연락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각별하다. 연고지 없는 주문진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조언과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이 바로 텃세다. 사실 먹고사는 문제 다음으로 가장 크게 걱정한 부분이었다.
시골 하면 떠오르는 자연풍경과 한적한 생활을 위해 귀농이나 귀촌하는 사람들이 폐쇄적인 분위기나 외지인을 배척하는 이웃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사례가 더러 있다.
그 가운데 심지어 지자체 지원사업으로 대출을 받아 농사를 짓거나 어업을 하다가 포기하여 엄청난 경제적 손실도 뒤따라오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어촌살이를 앞둔 내게 있어서 가장 큰 걱정거리도 다가왔다. 하지만 커피공방에서 다양한 분들을 만나고 교류하게 되면서 정말 다행히도 텃세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적응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시간이 흘러 나처럼 주문진살이를 시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내가 받은 조언이나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게 해 주었다.
처음 커피공방을 찾아가게 된 것은 어촌에 살기 전에 실행했던 “무작정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수산시장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며 수산물을 공부하고 어촌계장님을 만나 상담을 했었다.
이어서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커피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주문진이 속한 강릉은 커피의 도시이기 때문에 잘 알아야 한다는 단순함으로 출발했다.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홈카페가 유행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새 집으로 이사 온 기분을 내고 싶은 마음에 커피머신기를 사게 되었다.
주방 한 켠에 그럴싸한 장비까지 생기니 커피를 더 이상 갈증해소용으로만 마시면 안 되겠다는 이상한 각오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원두별로 무슨 맛의 차이가 있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집 주변에 카페도 많으니 원두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검색해 보니 마침 한 군데가 있었다. 아내와 함께 바로 찾아가게 되었다. 그게 커피공방과 맺어진 인연의 시작이었다.
길가 작은 마당 위에 서있는 허름한 조립식 건물로 된 커피공방의 첫인상은 녹신한 그리움이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가장 먼저 보인 건 황동으로 된 커피 로스팅기와 낡은 소파와 작은 의자들이었다.
낯설기도 하면서 어딘가 익숙하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학교를 가기도 전 어릴 때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갔었던 복덕방이 떠올랐다.
동네 사람들이 오며 가며 들려 안부를 묻거나 닳고 닳은 바둑판 위에서 장기를 두던 아저씨들이 있던 그 복덕방.
그곳 한 켠에 있는 연탄난로 위에는 빛바랜 양은 주전자가 항상 김을 뿜고 있었는데, 아마 놀러 오는 사람들 손마다 들고 있는 믹스커피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울이라 공기는 차갑지만 사람들의 온기와 종이컵에서 나오는 커피연기가 어우러져 나른해지는 그곳을, 지금 생각하면 난 참 좋아했었던 것 같다.
이것도 데자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인자해 보이시는 사장님 부부께서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를 내주셨다.
한 모금 들이키자, 얼었던 몸 안에 스며들어 온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날숨을 통해 입천장으로부터 코까지 잔향이 진하게 맴돌았다.
전문가처럼 바디감이나 산미도라는 단어를 곁들여 맛을 표현해야 할 것 같은 깊은 맛이었지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키라노만 마셔온 터라 고작 맛있다는 표현밖에 해드릴 수 없다는 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사장님께서는 따뜻하게 웃으시면서 타주신 커피의 재료로 쓰인 원두의 이름과 주요 맛의 특징을 차분하게 설명까지 해주셨다.
그리고는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셨다. 아마 놀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여기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놀라신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 어촌계장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주문진에 정착했음을 직접 알린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분 다 주문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신 현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해오신 일이 다르다는 점이 의미가 컸다.
어촌에 오랫동안 살아온 어부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는 최초의 만남인 셈인 것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연탄불로 달군 유리병 플라스크를 통해 커피를 내린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커피를 볶고, 내리셨다고 하셨다.
사장님 연세를 생각해 보면, 무려 50여 년 동안이었다. 아까 마신 커피 한 모금이 감격적인 이유를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촌계장님에 이어 주문진에 살고 있는 현지인에게 받은 두 번째 질문이었다. 최초로 내게 질문을 하신 어촌계장님께는 감성을 배제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답변을 드렸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공방 사장님께는 정반대로 말씀드렸다. 바다가 좋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는 건지 내가 말하면서도 놀랬다. 순간 이것도 아까 마신 커피 한 모금의 영향으로 한껏 오른 감성 때문인가 싶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답변을 드렸음에도 공방사장님께서는 표정 변화 없이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응시하시면서 말씀해 주셨다.
어촌살이를 시작하긴 했어도, 수많은 텃세에 대한 이야기들로 인해 지레 겁을 먹고 채우게 된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된 순간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해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촌계장님께서는 이성적으로 응원해 주셔서 현실을 마주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해 주셨다면, 이곳 공방사장님께서는 감성적으로 환영해 주셔서 정말 오길 잘했다는 확신을 들게 해 주셨다.
이 묘한 밸런스가 너무나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낭만과 현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앞으로 어촌살이를 하며 뭐 하나 부족하거나 초과되는 것 없이 균형을 유지해 나가자는 각오.
꼭 파도와 마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바닷가에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 나게 해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3년 동안 지내면서 정말 자주 찾았다. 그러 면서자연스럽게 많은 분들도 만나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공방사장님의 오랜 죽마고우들이셨다.
그중 어떤 분들은 중간에 일이나 사업 때문에 외지로 나가시기도 했었고, 주문진에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 하시던 일에서 모두 은퇴하시고 모두 주문진에서 모여 살며 이렇게 공방을 아지트 삼아서 커피 한 잔 마시러 오시고 계신 것이다.
이곳을 찾는 어른들과 대화하다 보면,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으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배울 점도 정말 많다.
삶의 태도에서부터 자녀 교육관, 노후를 위한 건강관리, 경제관 등 자기 계발서를 꼭 찾아서 읽지 않더라도 그분들과 커피공방에서 대화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큰 울림들을 많이 느낀다. 지금은 그 어른들은 모두 나의 롤모델이다.
어제 같은 경우는 제법 많은 분들이 모이셔서 동창회 느낌이 물씬 났다. 나와 아내도 중간에 껴서 함께 담소를 나눴는데, 어색함 없이 정말 편안했다.
연고지 없는 곳에서 나이와 세대를 초월하여 요즘 일상들과 관심사를 나누고 함께 포크송을 들으며 흥얼거릴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커피공방을 처음 갔을 때 왜 어릴 적 복덕방이 오버랩되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종류는 엄연히 다르지만 두 곳 모두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이어지는 사람들과의 정겨운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카페는 커피뿐만 아니라 공간을 함께 파는 곳이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 두고는 핸드폰만 들여다보느라 대화가 없는 장면을 많이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카페는 커피만 덩그러니 있는 공간이 아닌, 커피 잔을 들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있고 경청이 있는 공간이다.
주문진에는 있다. 그런 카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