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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낚는 어부 Dec 28. 2023

바다는 낭만과 현실이 공존하는 곳.

#어촌살이 1년 앞둔 이야기

반 즉흥적으로 어촌에 살기로 결정하고 나서, 아파트 입주까지 1년을 앞두고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나름의 개똥철학 아래, 어촌에 가게 되면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 고민을 했다.    

 

처음에는 주문진에 살게 되었으니, 수산시장 하나만 떠올리면서 당연히 수산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1차원적인 생각을 했다. 


낚시를 해본 적도 없고, 생선이라고는 마트에 파는 고등어와 꽁치만 구분할 줄 알았던 나는 일단 해산물에 대한 책을 사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더 나아가 자격증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다니고 있던 회사를 당장 그만둘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해 놓자는 정말 단순한 생각이었다.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수산물품질관리사와 수산물 경매사 이론 강의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수산양식산업기사라는 시험에도 응시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1차 필기 불합격.     


취업 가산점도 아니고, 그저 어촌에 살기 전에 미리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던 좀 특이한 자기 계발 활동으로 기억된다. 아쉽게도 스펙으로 연결은 안 되었지만 덕분에 수산시장에서 물고기 종류별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지자체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이었다. 먼저 ‘강원귀어귀촌지원센터’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홈페이지에서 보니, 나는 어업인이 아닌 사람이 어촌에 자발적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귀어촌인으로 분류되었다. 


새롭기도 하고 낯선 명찰을 달게 된 것 같아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센터에는 나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귀어닥터 신청서를 작성했다. 


멘티와 멘토의 관계로 상담을 받는 것이다. 상담사로 소개받은 분은 주문진 안에 있는 작은 항구의 어촌계장님이었다.     




작은 횟집 안에서 그분을 만났다.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라고 어색해하는 나에게 짤막하게 소개해주셨다. 


소금기로 얼룩 진 창밖으로 햇빛을 받은 바다는 찰랑 거렸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을까.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메뉴판에 눈길이 갔다.      


가장 위에 적혀있는 문어숙회의 가격은 ‘시가’였다. 대략 얼마쯤 일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늠해 보는데, 주방에 계셨던 아주머니께서 뜨끈한 믹스커피 한 잔과 가지런히 깎은 사과접시를 내주셨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시고는 채소를 서걱서걱 썰기 시작하셨다.      


새콤한 회 무침에 찬 밥 한 덩이를 말아 쓱쓱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어촌계장님이 헛기침을 한 번 크게 내시고는 내게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바지춤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꺼내시고는 불을 붙이셨다. 

    

“그런데, 왜 바닷가에서 살려고 해요?”     


아파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순간부터 줄곧 받아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주문진에 살고 있는 현지인에게 받은 첫 질문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담배 연기에 주방에서 쏘아보시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런데도 어촌계장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순간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눈앞에 놓여있는 사과조각을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조직에 지원하게 된 동기를 묻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은 취업준비생이 된 기분 같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고 차마 대답은 못했다. 


거친 바다에서 삶을 꾸려 나가는 어부들 앞에서 바다를 그저 낭만적인 곳으로만 바라보는 감성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를 가벼운 뜨내기 정도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이성적으로 솔직하게 현실을 말씀드렸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동경해 온 것은 맞지만, 직장 때문에 영동지방에서 오래 살게 되었고 마침 정착을 하려고 알아보던 중에 주문진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리고 어업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내 말이 끝나자 어촌계장님은 담배를 비벼 끄셨다. 그리고는 한 모금 정도 남은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시고는 미소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바다는 현실과 낭만이 같이 있는 곳이에요. 주문진은 살기 정말 좋지. 근데 조건이 있어요. 여유로운 사람한테만 좋다는 거.”    

 

여유로운 사람이라는 부분에서 특히 힘을 주신 듯했다. 아마 돈이나 안정적인 직업, 또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씀하신 것 같다고 이해되었다. 


어촌계장님은 이어서 귀어닥터로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장단점에 대한 이야기뿐이며, 결국 선택은 나의 자유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든지 응원해 주신다고 하셨다.   

  

상담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오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대접해 주신 뜨끈한 믹스커피 한 잔과 함께 베풀어 주신 호의 덕분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현실적으로 말씀해 주셔서 나에게는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어촌에 살게 되었다고 물고기 이름과 산란 주기를 외우고 있던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어촌살이에 대해서 낭만보다는 현실과 마주하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촌계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여유로운 사람이란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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