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청량리동_이정옥
제기동은 조선 시대 한양의 북부 외곽에 자리한 전통적인 마을로, 수도의 기능을 보완하는 주변부 역할을 담당했다. 이 지역은 왕실과 국가 의례에 필요한 제단이 위치했던 곳으로, 종교적 의례적 상징성을 내포한다. 제의적 공간으로서의 역사는 제기동을 단순한 생활 공간 이상을 만들었다. 이는 구도심의 전통적 맥락, 즉 의례적 중심성과 생활 중심성이 공존했던 특징을 보여준다.
전통적 상업 중심지_ 제기동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약재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구도심의 상업적 장소성을 강화했다. 서울 약령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넘어 전통 한약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울 구도심의 핵심 특징 중 하나인, 전통 상업과 상업 기능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한약재를 매개로 국내외의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더 넓은 지역적 특징의 확장이 형성되었음을 드러낸다.
근대화와 구도심의 재구성_ 20세기 초중반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동은 공간적 재구성과 함께 변화한다. 청량리역의 등장으로 이 지역은 철도 교통망의 요충지가 되었고 이는 구도심의 상업과 물류 기능을 활성화했다. 상업과 주거의 혼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제기동은 전통적 공간으로서의 약령시장과 근대적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인 청량리역과 경동시장으로 이중적 장소성을 갖추게 된다. 이는 변화하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적응해왔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장소성 _ 제기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자, 서민, 중산층이 함께 거주하며 전통과 현대가 맞물려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특히, 경동시장과 청량리 종합시장은 서민 경제의 중심지로, 제기동의 사회적 장소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보다는 지역 사회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성장한 곳이다. 시장과 상업 중심지의 발달, 교통 인프라의 확장 주민들의 생활 문화가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간은 유기적 성장 과정을 상징한다.
시간성과 기억
제기동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메를로퐁티의 시간적 지각 개념과 연결된다. 오래된 건물과 골목길은 주민과 방문객에게 과거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현재의 경험과 연결된다. 정릉천과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활발한 시장과 한옥은 지역의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며 공간에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을 부과한다. 또한 과거의 역사적 배경과 어우러져 새로운 시간적 의미를 창출한다. 메를로 퐁티는 공간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 있다고 보았다. 현대의 제기동은 일상이 공존하는 장소로, 시간적 경경험과 기억을 환기시킨다.
골목길의 경험과 지각
메를로 퐁티는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신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좁은 골목길은 방문자와 주민들에게 독특한 신체적 경험을 제공한다. 걷기의 체험은 도로에서 보도 그리고 좁은 골목을 지나 끝에서 다시 나타나는 보도와 도로는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공간의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건물의 타일, 콘크리트, 나무문의 표면은 단순히 시각적 관찰을 넘어 촉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지각은 특정한 의도를 향한다. 오래된 지역의 주택 단지에서 사람들은 공간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찾거나 현재의 정서를 느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주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과 만나거나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공간을 재의미화 하는 감각을 가진다.
장소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경계나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장소는 인간과 세계가 상호작용하며 의미와 경험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장으로 정의된다. 장소를 점유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닌, 삶의 본질적이고 현상학적 맥락에서 관계 맺고 의미를 구성하는 장으로 확장시킨다. 슐츠의 장소의 영혼은 고유한 정체성과 정신을 통해 인간의 삶과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리적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맥락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다. 한편, 메를로 퐁티는 장소를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 느끼고 경험하는 관계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오래된 지역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골목길은 좁아졌다가 넓어지고 휘어지는 방향성으로 인간의 감각을 자극시킨다.
결론적으로 이 두 이론을 적용하면 장소성은 인간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생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장소는 인간의 신체적 움직임과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살아 숨쉬는 공간이자, 그곳에 얽힌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이 된다. 현대의 도시와 건축설계에 있어서 개발의 대상은 제고하고, 인간 경험과 지역적 정체성을 존중하며 장소가 가진 고유한 의미와 정신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현대의 획일화된 도시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장소의 의미와 인간 경험의 풍요로움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제공한다. 삶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가 담긴 살아있는 경험의 무대라는 점에서, 이를 설계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이젠, 서울의 몇 남지 않은 오래된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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