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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cehost Nov 12. 2023

생경(生景)하다

정릉골_정창윤

사람이 빈 곳에는 자연스레 식물이 스며든다. 정릉골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마주치는 빈 집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다. 그 모습이 싱그럽지만 어딘지 서글프다. 도시라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환경에서 사람과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우세하는 모습은 이상적이지 않다. 정릉골의 재개발이 시작되면 모두 뿌리째 뜯겨 나가겠지. 그때까지는 쓸쓸하지만 평화로운 지금의 상태를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

거주지가 평생 도심 중앙이었던 내게는 정릉골의 골목 풍경이 너무 다채롭고 풍성하게 다가온다. 가까운 산이 아닌 동네 비탈길을 내려가다 밤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마치 다음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꼭대기에 있을 것 같은 계단과 소나무를 칭칭 감고 완전히 자리 잡은 덩굴도 역시 그렇다. 무너진 담벼락을 비집고 나와 꽃은 피운 무궁화와 예쁜 초록색의 이끼가 낀 나무 계단, 벽면을 가득 메워 남들보다 먼저 단풍을 물들이고 있는 담쟁이, 키 큰 나무들 가지사이로 동그랗게 들어오는 햇빛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자라고 있는 풀들 모두 떠나간 사람들과 같이 살자고 손짓하는 것 같다. 울 안에  살아있는 풍경들(生景)이 점차 생경(生梗)한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자연은 인간을 사랑한다. 언제나 그 사랑을 배반하고 이용하는 건 자본주의로 집약된 인간의 마음이다. 정릉골의 자연 역시 그들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뒤집어지고 파헤쳐질 것이다. 그래도 자연은 살아남는다. 우리는 과연 자연을 배제하는 지금의 방식으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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