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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Mar 03. 2020

물고기는 울지 않는다

물고기가 사람을 만났을 때 2 <설국열차>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앞칸에만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다. 문을 열고 한 칸, 또 한 칸, ... 앞으로 간다. 하나둘 동료들을 잃고, 커티스(Chris Evans 분)는 홀로 엔진 칸에 닿는다. 혁명은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커티스는 윌포드(Ed Harris 분)를 죽이지 못한다. 엔진의 심장 안으로 들어간 커티스, 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더니 곧 흐느끼기 시작한다. 웅- 웅-, 돌아가는 엔진 소리. 외로움, 무력감, ... 윌포드는 자신은 이제 늙었다며 커티스에게 열차의 새 주인이 되어 줄 것을 제안한다. 기차에 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엔진의 강한 힘을 느낀 커티스는 ‘이것이 너의 운명이야’라는 윌포드의 말을 받아들이려는 듯 성냥을 달라고 달려오는 요나(고아성 분)를 내친다.


열차는 엔진칸부터 꼬리칸까지 각각의 기능이 정해져 있다. 관객은 커티스를 따라가며 꼬리칸에서 엔진칸까지 열차의 모든 곳을 가 보게 된다. 다음 칸으로 넘어갈 때마다 ‘우와~ 이런 것까지 있단 말이야?’하고 놀랄 정도로 열차는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학교, 병원, 양복점, 레스토랑, 미용실, 사우나, 클럽 등 상류층이 누리는 문화와 서비스는 꼬리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열차의 ‘앞’은 사회적 계급과 신분의 ‘위’를 의미한다. “신발은 발 밑에, 모자는 머리 위에! 이 기차에서 나는 모자, 너희는 신발이야.”라는 메이슨 총리(Tilda Swinton 분)의 말처럼 사람들에게는 각자 정해진 자리와 역할이 있다. 하지만 꼬리칸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앞으로 가야 한다. 체제를 유지하려는 앞칸(지배층)과 혁명을 꿈꾸는 꼬리칸(피지배층)이 부딪히는 인간사회의 모습을 열차라는 좁은 공간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열차의 칸칸을 생명의 진화와 인류문명의 발전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창문 하나 없는 동굴 같은 꼬리칸은 컴컴한 깊은 바닷속이다.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 초기인류가 등장한다. 뇌가 발달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만들고, ... 인류는 자연과 세상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인류는 신(남궁민수: 열차의 설계자다)과 선지자(요나: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의 이름이다)의 힘을 빌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원시적인 깜깜한 삶에서 벗어난 인류에게 한낮의 눈부신 햇빛이 쏟아진다. 얼굴을 가린 덩치 큰 진압군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짐승들이다. 긴 터널 구간은 어두운 밤이다. 인류는 불을 발견해서 짐승들과 맞설 힘을 갖고 그들을 무찌른다. 인류는 이동하다가 강(물 공급칸)을 찾고 물을 활용한다. 식물원, 수족관, 정육점 칸은 채집, 낚시, 사냥 활동과 그에 따른 수확물로 볼 수 있다. 이는 정착과 함께 시작된 작물화, 또 가축화와도 연결된다. 그보다 더 앞칸에서는 인간만이 만들어낸 문화, 기술, 쾌락 등 현대 문명의 역사가 펼쳐진다.



인간이 만든 자연재해, 하얗게 덮여 버린 세상 위를 열차는 외롭게 달린다.


지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버렸다. <설국열차>의 오프닝 씬에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냉각제인 CW-7을 뿌릴 거라는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비행기가 CW-7을 살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CW-7의 대량 살포 직후, 거대한 한파가 세계를 덮쳤다. 새로운 빙하기,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종되었다.’라는 자막이 이어지고 한 줄기 빛이 펜던트의 ‘Save the Planet’이라는 글자를 비춘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했고 그것은 인간에게 재해로 돌아왔다. 인간은 자연의 위협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설국열차)을 만들어 그곳에서만 살아간다. 모든 것이 다 얼어 붙지는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열차는 아슬아슬하게 외길을 달리고 있다. 열차는 멈추지 않고, 멈추면 안 된다. 왜 멈추면 안 되는지, 그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제 잠깐, 열차에서 내려 보자. 그리고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와 보자. 무한한 우주에서 그저 점 하나일뿐인 지구, 그 지구 위를 달리는 열차 한 대에 모든 운명을 맡긴 인류는 너무 작고, 또 작다. 초라하고 불쌍하다. 칼 세이건(Carl Sagan)이 아마 이 풍경을 볼 수 있었다면 “failed gloomy train”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을 보고 “pale blue dot” 이라고 말했다.) 인간들은 자연과 함께 살지 않고,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생태계에 아무런 기능과 기여를 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만든 열차는 인류의 실패작이다. 영화의 배경이 2030년대이니, 이것은 십여 년 후면 우리가 맞이하게 될 가까운 미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국열차>는 인간들이 지금처럼 자연을 파괴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환경영화다.


커티스는 남궁민수(송강호 분)에게 앞칸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한다. 커티스는 윌포드를 죽이고 새 리더를 뽑으면 꼬리칸과 앞칸의 불평등이 없어질 거라고 믿는다. 그는 리더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할 뿐, 열차와 엔진은 영원할 거라고 믿고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차를 설계한 남궁민수는 “모두가 이것을 벽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문이다.”라며 엔진칸으로 가는 문이 아닌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고 말한다. 남궁민수는 열차 안이 아니라 밖에서 희망을 찾는다. 결국 불이 붙은 크로놀 덩어리가 폭발하고 그 충격으로 눈사태가 일어난다. 열차는 끊어지고 전복되며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바퀴벌레는 살았을 것 같다.) 커티스와 남궁민수의 보호로 살아남은 요나와 티미(Marcanthonee Jon Reis 분)는 옆문을 통해 열차 밖으로 나온다. 처음 마주한 열차 밖 세상, 요나는 땅에 첫발을 내딛는다. 밖은 생각만큼 춥지 않다. 요나는 모자를 벗는다. 인간은 그렇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먹을 것'으로 연결되며 '삶'의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한다.


생존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다. 꼬리칸 사람들은 음식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 먹어서 어떤 맛인지 기억도 안 나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고, 감시병들에게 거무튀튀한 단백질 블록 대신 치킨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나중에 꼬리칸 사람들은 단백질 블록의 재료가 바퀴벌레인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생태계의 균형을 강조하는 앞칸 사람들에게 1년에 10만 마리를 낳는 강한 번식력을 가진 바퀴벌레는 꼬리칸 사람들을 먹일 최고의 재료였을 것이다.) 반면 앞칸 사람들은 신선한 토마토, 삶은 달걀, 닭고기와 소고기도 먹는다. 메이슨 총리는 수족관칸에서 커티스 일행에게 초밥을 먹게 해 준다. 최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1년에 딱 두 번밖에 먹지 못하는 초밥이다.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만 먹다가 맛본 초밥은 어떤 맛일까? 왜 수많은 음식 중에서 생선초밥일까? 감독은 꼬리칸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상태와 가장 가까운 날 것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물고기의 ‘살아있다’는 느낌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열차의 안과 밖으로 단절된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고리다.


요나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열차에서 처음 밖으로 나온 요나와 티미는 북극곰을 본다. 요나는 어떤 미래를 보았을까? 요나는 북극곰이 먹이를 찾으러 가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북극곰을 따라가 보면 어딘가 얼지 않은 호수 같은 물이 있을 거고, 거기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물고기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들은 북극곰을 통해 ‘바깥 세상에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요나와 티미는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원래 자연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두 사람은 인류멸망에서 살아남은 새 조상이 될 것이다. 북극곰은 오프닝 씬과 이어지는 지구온난화의 상징(북극의 얼음이 녹고 먹을 것이 없어 삐쩍 마른 북극곰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고 한다.)이기도 하면서 마지막 컷에서는 인류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물론 또 오랜 시간이 지나 요나와 티미로부터 인류가 번성하고, 다시 인간들이 북극곰의 앞발에 유리병을 들게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물고기는 형태적으로도 삶과 죽음의 양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 영화에서 실제 물고기가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 있다. 커티스 일행이 자신들을 막아서는 진압군과 싸우는 칸에서다. 문을 열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진압군이 나타나고 뒤쪽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앞으로 전달된다. 진압군 하나가 도끼로 물고기의 배를 갈라 동료에게 넘기고, 동료는 물고기 뱃속에 도끼를 넣어 피를 묻힌다. 굉장히 상징적인 이 컷에 대해 감독은 ‘이제 너네들 다 죽었다, 피의 축제가 시작된다.’라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물고기일까? 만약 물고기가 아닌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물로 바꿔 본다면...? 소리를 지르고 몸을 떨고 있을,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물고기는 그렇지 않다. 곤충을 제외하고, 물고기는 인간이 가장 약한 힘으로 죽일 수 있는 동물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문어를 끓는 물에 집어넣고, 잡은 물고기를 바로 회를 떠서 먹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가능한 건 물고기들이 죽을 때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현장의 소리를 모두 제거하고 오직 생명을 죽이는 시각적 효과, 죽음에 대한 경고만 남긴다.


전투 중에 커티스는 물고기를 밟고 뒤로 넘어지며 위기를 맞는다. 감독은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가장 치열한 전투씬에서 물고기를 통해 삶과 죽음, 또 그 경계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죽고 사는 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야.”라는 윌포드의 말처럼 살고 죽는 건 한 순간이고, 어쩌면 그 둘은 대칭하는 양면을 가진 물고기처럼 경계를 나눌 수 없는지도 모른다. 커티스는 윌포드만 죽이면 열차의 모든 게 바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누가 새 리더가 되더라도 열차는 계속 달려야 하고, 인류는 열차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과연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커티스는 엔진칸에서 티미와 앤디(Karel Veselý 분)를 만난다. 티미는 바닥 아래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간에 쭈그려 앉은 채 엔진의 부품이 되어 있다. 그 광경을 본 커티스와 요나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엔진이 수동 모드로 전환되자 벽속에 있던 앤디가 밖으로 나온다. 커티스는 애타게 앤디를 불러보지만 앤디는 대답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두 아이는 아무 표정이 없다. 그들은 울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커티스는 그제야 열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요나에게 성냥을 건넨다.


미국 뉴욕 문화 평론지 벌쳐(Vulture)에서 봉준호를 인터뷰했던 내용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설국열차> 제작 당시, 배급사 대표인 하비 와인스타인 Harvey Weinstein(성범죄로 얼마 전 영화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했다.)은 봉준호의 편집본에서 25분을 잘라내고 액션 장면을 더 넣자고 했고, 거기에는 진압군이 도끼로 생선의 배를 가르는 장면도 포함돼 있었다. “웬 생선? 액션이 더 필요해.”라는 하비의 말에 봉준호는 “이 장면은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개인적인 건데 제 아버지가 어부였거든요. 이 장면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하비는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 장면은 놔둬도 된다고 했다. 자칫 이 글의 주인공이 바퀴벌레가 될 뻔했는데 아버지께서 어부(?)셨다니... 물고기를 잡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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