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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Mar 08. 2020

살거나 혹은 먹히거나

물고기가 사람을 만났을 때 3 <옥자>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지금까지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무엇인가요?” 미국 영화매체 콜라이더(Collider) 기자가 묻는다. “알프레도 히치콕(Alfredo Hitchcock)의 <싸이코 Psycho>.” 봉준호가 대답한다. “몇 번이나 보셨어요?” 기자가 다시 묻는다.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﨑 駿)의 <이웃집 토토로 となりのトトロ>, 우리 아들 때문에. 아들이 여러 번 봐서 같이 보느라 100번은 더 봤어요.” 봉준호의 대답에 기자가 크게 웃는다. 봉준호는 <싸이코>는 50번,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30번 넘게 봤다고 덧붙인다.


좋아하는 영화, 존경하는 감독의 작품도 겨우(?) 50번, 30번을 봤을 정도인데 100번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다른 인터뷰에서 봉준호는 운동을 1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그가 시간을 보내는 일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 영화를 만들거나. 둘, 영화를 보거나. 그런 그가 어린 아들과 놀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과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이었나 보다. 아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한 번, 또 한 번 보다 보니, 아들을 향한 사랑과 부모로서의 의무가 100이라는 숫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에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이 피자박스 접기 아르바이트를 할 때 참고하는 동영상의 여자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된 작업으로 그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낸다. 몸에 밴 동작은 무의식에 가까운 무조건 반사적인 행동에 가깝다. 영화를 보는 데에도 달인의 영역이 있지 않을까? 한 영화를 100번 보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많이 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고, ‘100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도 결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비록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봤다고 하더라도, 영화감독의 눈에 100번이나 맺힌 장면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리 없다. 아마 봉준호의 뇌세포에는 <이웃집 토토로>의 장면 하나하나가 박혀 있을 것이다.



미자와 옥자의 몇몇 장면에서 메이와 토토로의 모습이 보인다.


<플란다스의 개>를 촬영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개들에게 무척 미안했다는 봉준호는 옥자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옥자는 슈퍼돼지인데 생김새는 돼지, 하마, 코끼리, 매너티를 섞어서 디자인됐다. 한 인터뷰에서 봉준호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시골 관객이 옥자를 보고 실제로 있는 동물인 줄 알고 어느 나라 종이냐고 묻는다면 최상의 찬사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바람처럼 세상에 없는 동물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재하는 것 같은 캐릭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옥자다. 옥자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사람 같은 눈, 강아지 같은 행동, 미자(안서현 분)와 교감하는 모습 등 여러 요소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옥자의 크기다. 봉준호는 <괴물>의 괴물을 디자인할 당시 한강의 공간적 배치와 움직임을 고려해서 크기를 정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옥자는 어떻게 정했을까?


나는 극장에서 처음 <옥자>를 봤고, 다시 볼 때는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도 추천 리스트에 있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게 되었다.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내용과 장면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가 중반에 들어서야 메이가 나무숲속으로 들어가며 토토로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메이는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큰 토토로를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장난을 치고 재미있어한다. 그러다가 피곤한지 토토로 배 위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만다. 나는 이 장면에서 번뜩 <옥자>가 떠올랐다. ‘메이-토토로’에게서 ‘미자-옥자’가 겹쳐 보였다. 봉준호가 그린 ‘작은 여자 아이와 커다랗고 이상한 생명체’는 이미 꽤 익숙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나는 감독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옥자를 디자인하면서 토토로를 많이 참고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입, 표현이 풍부한 눈, 여러 동물을 섞어 놓은 생김새(토토로도 곰, 토끼, 강아지 등이 섞여 있는 도깨비다.)까지 옥자와 토토로는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비율’이다. 봉준호는 메이와 토토로의 몸 비율에 맞춰 옥자의 크기를 정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작은 미자와 큰 옥자라는 크기의 대비, 불균형, 이질감은 영화를 끌고 가는 핵심 요소다. 옥자의 큰 몸에서는 묵직한 무게감과 그에 따른 넘치는 힘이 느껴진다. 실제로 옥자는 물웅덩이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튀어 오르게 하기도 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 미자를 구해내기도 한다. 반면 미자는 연약해 보이는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산골에서 서울, 뉴욕으로 옮겨지면서 미자와 옥자의 무게감은 역전된다. 미자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점점 강해지고 그 반대로 옥자는 무력해진다. 감독은 미자와 옥자의 힘의 강도를 반대로 조절하고, 두 힘의 균형이 역전되는 순간의 모멘텀을 미자의 용기와 패기를 이끌어내는 동력으로 삼는다. 미자는 그 기운을 받아 미란도 그룹을 끝까지 밀어붙여 옥자를 구해낸다.



큰 물고기는 잡아 먹지만 치어는 다시 물로 돌려 준다. 자연생태계의 균형을 지키는 건 인간의 몫이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유독 어색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도 잘 모른다. 물론 봉준호가 그런 아버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봉준호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는 대신에 이 영화 <옥자>를 선물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사춘기를 지나는 모든 아들딸들이 그렇듯, 청년이 된 아들은 아빠와 같이 <이웃집 토토로>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감독인 아버지는 아들이 어릴 때 같이 봤던 토토로 그림에 선을 덧칠해 옥자를 만들어 보여 주며, 아들과 함께한 어릴 적 시간을 추억한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된 아들에게, 또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영화 속 장면에 넣어 전달하고 있다.


<옥자>의 산골 장면은 도시에서 태어난 요즘 아이들에게는 지구 반대편의 뉴욕보다 낯선 풍경이다. 민들레 홀씨를 불고 있는 미자와 지게를 매고 땔감을 구해 오는 희봉(변희봉 분)이 무척 신기해 보일 것이다. 와이파이는 있을까? 다행히(?) 고장난 텔레비전은 나온다. 요즘 시골에서도 거의 보기 힘든 옛날 시골의 모습은 도시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미자가 고기를 얻는 방법은 도시에서는 절대로 할 수도, 볼 수도 없다. 미자가 옥자에게 매운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옥자가 물웅덩이에 뛰어들어 물고기들을 물 밖으로 튀어 오르게 한다. 미자는 물고기를 잡아 그물망에 넣는다. 봉준호는 미자가 물고기를 직접 잡는 모습을 보여 주며 우리가 먹는 생선이 마트에 진열된 상품이기 전에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아울러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먹고 싶은 마음에 물고기를 잡아먹더라도 자연생태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에서의 살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거의 인류는 음식의 생산과 소비 과정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잔치 같은 특별한 날이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 직접 닭, 돼지, 소, 개를 잡아먹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고기를 먹고 있지만 동물을 직접 죽이지는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게 되면서 우리는 이 과정에서 멀어져 버렸다.


몇 년 전, 수온 상승과 노가리(명태 새끼) 남획으로 한국 바다에서 명태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처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활동은 어떤 종을 없애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큰 물고기를 잡은 미자가 치어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는 치어를 물로 던져 돌려보낸다. 그리고 옥자가 물에다가 똥을 싸자 물고기들이 그 유기물을 먹으러 모여든다. 이 장면에 봉준호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생명과 자연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이 닭을 먹지만 병아리를 먹지는 않듯이 새끼를 잡지 않는 것은 인류애로 표현되는 보편적인 사랑의 모습 중 하나다. (들이는 힘에 비해 별로 먹을 것이 없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철조망 안에 있던 슈퍼돼지 두 마리가 자신의 새끼를 밖으로 보내고 옥자가 그를 살려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혹시 알폰소와 강제로 교미한 옥자가 출산을 한다면 구해낸 새끼와 교미를 통해 농장이 아닌 자연에서 살아가는 슈퍼돼지의 생태계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멸종위기를 맞은 명태의 사례에서 보듯 자연생태계의 순환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린 일이다. 봉준호는 우리가 미자처럼 산골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인간이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며 살아왔는지 과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동물을 먹고 먹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일 뿐이다.


<옥자>를 보고 채식을 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이 말했듯이 이 영화는 채식을 하라거나 육식을 반대하는 영화가 아니라 대량 공급과 유통, 이윤 등 산업의 관점으로만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으로써의 고기 이전에 동물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영화다. 고기를 먹는 것이 생명을 이어받는 것이라며 동물을 죽이기 전에 자연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던 먼 옛날 사람들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육식은 이상할 것도,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동물도 동물을 먹고,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육식은 자연스럽게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오직 물속에서만 생존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사람을 만났을 때, 물고기의 운명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 살거나. 둘, 먹히거나. 물고기의 운명은 오로지 생사 여부를 쥐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봉준호는 인터뷰에서 돼지가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는데 인간은 돼지를 보면 고기부터 떠올리지 않냐며 돼지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 억울함은 ‘돼지=고기’를 연결시켜 산업, 문화, 관습 등으로 굳어진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 때문이다. 옥자는 미자에게는 가족이지만 미란도 그룹 직원들에게는 상품일 뿐이다. 옥자는 미자와 미란도그룹의 서로 다른 판단의 경계에 서 있다. 옥자를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결국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결정하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큰 힘은 거대 자본이다. 미자는 그것에 맞설 수 있는 힘인 돈(황금돼지)을 주고 ‘살아있는 옥자’를 사서 옥자를 살린다. 다가올 죽음을 알고 있는 듯 울부짖는 수많은 슈퍼돼지들을 뒤로 한 채로...


미자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잡은 물고기를 망에 넣을 때 꽤 큰 송충이 한 마리가 돌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실제든 컴퓨터 그래픽이든 감독이 관객들에게 잘 보라고 화면에 넣었을 것이다. 미자는 물고기는 먹지만 송충이는 먹지 않고,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죠니(Jake Gyllenhaal 분)는 옥자를 아프게 해서 살을 뽑아낸다. 미란도 그룹은 그 고기로 소시지를 만들어 맛을 본다. 내 눈에만 그 소시지의 모양이 송충이와 비슷해 보이는 건 아닐 것이다. 왜 소시지가 그런 모양인지, 그 이유는 감독만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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