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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Mar 13. 2020

밥상에 오른 동물들

봉준호 감독과의 식사 시간 1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봉준호는 어느 인터뷰에서 하루에 책을 세 권 읽거나 세 번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세 번 성관계를 맺지 않지만 세 번 먹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밥(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영화에는 유독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영화감독들은 평소에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작품에 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제작과정에서 빠질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에는 ‘음식(특히 밥)을 먹는 장면’이 많이, 또 빠짐없이 나온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묻는 두만의 대사는 평소 봉준호가 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 주는 일례다. (사실 이 대사는 감독이 쓴 게 아니라 송강호의 여러 애드립 중 하나였다고 한다. 봉준호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었지만 빼자는 의견이 나올까 봐 기술시사까지 이 대사가 없는 버전을 보여 준 후에 배급 전에 대사 장면을 넣어 편집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의 인사말인 “식사하셨어요?”가 실제로 밥을 먹었는지 여부를 묻는 데 그치지 않듯 봉준호에게 밥을 먹는 것은 생활이나 안부를 묻는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식사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 ‘식구’라는 것이다. 식구(食口)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밥 먹는 입’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싫어하는 사람과는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이 고역이듯 밥상에 둘러앉는 건 서로를 좋아하고 믿을 수 있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의 영화에서 같이 밥을 먹는 가족, 친구, 동료들은 모두 식구다. 봉준호는 밥을 먹는 장면을 통해 이 사람들이 의지하고 뜻을 같이하는 식구라는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그들끼리의 친밀감과 연대감을 더 강하게 한다. 가끔 등장인물이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도 옆에 다른 인물이 꼭 있다. 다른 인물이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건 그들이 식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혁명의 동료들과는 초밥을 먹지만 엔진 칸에서 윌포드가 요리해 내놓는 스테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커티스에게 윌포드는 식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밥을 같이 먹는 건 식구에게만 허락된다.


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식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봉준호는 가족과 식구를 철저히 분리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와 은실은 부부지만 단 한 번도 같이 밥을 먹지 않는다. 바닥에서 호두를 까고 있는 남편과 식탁의자에 앉아 그 호두를 하나씩 꺼내 먹는 아내에게서 뒤틀린 관계가 표현된다. 두 사람은 결혼으로 이어진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니다. 이는 비좁은 문구점에서 붙어 라면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호프집에서 치맥을 하는 현남-장미와 대비된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고 때로는 욕도 서슴치 않는 사이지만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고, 식구다. ‘식구인 가족’과 ‘식구가 아닌 가족’은 <기생충>의 두 가족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택네 가족은 전원 위장 취업이라는 사기극의 계획을 짤 때마다 같이 밥을 먹고,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술파티를 벌인다. 그러나 박 사장네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는 일은 없다. 그들은 아줌마가 방으로 가져다 주는 과일을 각자의 방에서 따로 먹는다. 짜파구리를 먹는 연교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충숙은 일하는 아줌마일 뿐이지 식구가 아니다. 연교는 혼자서 짜파구리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먹는 장면’ 안에서는 ‘먹이는 행위’도 중요하다. 누구에게 무엇을 먹이는 것은 사랑이다. 강두네 가족은 괴물에게 납치된 현서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플까 걱정한다. 가족들이 괴물을 잡으러 한강공원으로 들어갔다가 자신들의 매점에서 허기를 달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밥상 아래에서 현서가 슬며시 일어난다. 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는 돌아가면서 아이의 입에 음식을 물린다. 영화의 마지막, 괴물이 사라지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 한강 매점에서 강두는 현서가 살린 아이 세주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이처럼 식구는 먹이는 행위를 통해 식구의 구성원 중에서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를 살피고 보호한다. 친구 하나 없이 산골에서 사는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과 바보 아들 도준의 엄마인 마더도 아이들의 유일한 식구다. 먹이는 것을 통한 사랑의 모습은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도준에게 마더가 보약을 먹이는 장면에서 극단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음식을 먹는 장면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밥상에 오른 동물들에도 눈이 간다. 봉준호가 차리는 밥상에는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가장 만만한 건 역시 닭이다. 닭고기뿐 아니라 달걀요리까지 열거하면 거의 모든 영화에 나온다. 닭은 우리가 흔히 먹는 고기 중에서 살아있을 때의 형태가 음식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동물이다. 감독은 통닭, 생닭, 백숙 등 다양한 음식에서 그 형태를 화면에 잘 보이게 놓는다. 소고기는 주로 구워 먹는데 형사들은 안창살을 굽고, 열차에서는 스테이크를 굽는다. 짜파구리에 들어간 한우채끝살은 그 자체로 별미다. 베이컨과 소세지 냄새가 한낮의 파티를 알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돼지들이 죽는 즉시 고기로 팔려 나간다. 그리고 모두 알고 있듯 개도 먹는다. 물론 옛날 시장에서 팔던 것처럼 고기의 형태로 화면에 나오지는 않는다. 방금 막 잡은 싱싱한 물고기는 매운탕으로, 초밥으로 먹는다. 뷔페에서는 굴을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을 먹고, 한강에서는 다리가 구 개밖에 없는 오징어도 먹을 수 있다. 골뱅이와 연어캔은 위급한 상황에서 꼭 필요한 음식이다.



화면에 가득 찬 고기는 몸과 마음이 지친 인물들에게 기운을 불어 넣는 음식이다.


“점심 뭐 먹지?”라는 질문에 제육볶음 대신 ‘감자볶음’이라고 말하거나 ‘맛있게 버무린 시금치나물’이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문장에 ‘거의’라는 부사가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는 여지와 희망을 남기고 싶다.) 사람들은 밥상에 고기 반찬이 없으면 허전하다고 느낀다. 또, 차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기가 들어간 요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손님에게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야 밥을 잘 먹은 것 같고, 푸짐하게 먹었다는 느낌을 받고, 힘이 난다고 말한다. 고기는 사람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에너지다.


현남은 개를 던져 죽인 사람을 있는 힘을 다해 쫓지만 코앞에서 그를 놓치고 만다. 그의 분노와 아쉬움을 들어주는 건 친구 장미다. 하지만 맥빠지고 허기진 그의 몸에 에너지를 채워 주는 건 통닭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형사들은 범인을 잡는 데 신경이 곤두선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뿐 아니라 끔찍한 시체를 눈앞에서 보고 썩는 냄새를 참아내는 것도 아무나 못 할 짓이다. 형사들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소고기를 먹으며 힘을 낸다. 윌포드는 엔진칸에 도착한 커티스에게 스테이크를 내놓는다. 유일하게 꼬리칸에서 엔진 칸까지 다 가 본 사람, 그 길고 험한 여정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열차의 주인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성의다. 부랑자 최씨는 변경비가 끓인 보신탕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냄비째 비운다. 아마 그는 오랜만에 먹은 고기와 국물에 행복했을 것이다. 경찰에 잡힌 그를 방송국에서 인터뷰한다. “구치소에 가면 아침식사는 튀김, 점심식사는 돼지고기, 저녁식사는 이면수…” 부랑자에게 고기는 정상적인 생활에 대한 꿈이고, 그 이전에 생존을 위한 음식이다.



인간은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직접 죽이지 않지만 고기 반찬에는 차린 사람의 정성과 성의가 느껴진다.


현대의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기를 상품으로 쉽게 얻게 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다. 신체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없는 인간이 사냥을 해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명이 힘을 모아야 했고, 힘들게 잡은만큼 사람들은 고기를 나눠 먹으며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강한 소속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정치, 종교, 문화, 관습은 사람들에게 허락된 경우에만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했다. 결혼이나 회갑에 잔치를 열고 키우던 동물을 잡아 고기 요리를 준비한 건 그런 날이 개인의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밥상에 올린 고기에는 먹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존경이 담겨 있다. 저녁밥을 차려 놓고 남편을 기다리던 여자는 전화를 받는다. 그는 빨간 점퍼를 입고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가 결국 사고를 당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을 본 남편은 얼마나 울었을까? 밥상에는 맛있게 구워진 생선 한 마리가 올려져 있다.


오스카 시상식 이후 회자되는 봉준호의 수상 수감과 인터뷰 중에서 인상적이면서 재미있었던 말은 그가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점심 몇 시야?”라는 것이었다. “봉준호 세계에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고, 정교하게 구축이 되어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배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장 정교함이 빛나는 것은 밥때를 너무나 잘 지킨다는 것이죠.” 배우 송강호도 어느 회견에서 감독의 능력을 추켜세우며 특히 점심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점을 콕 집어 칭찬한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우리가 흔히 농담하는 것처럼 ‘당이 떨어지면’) 쉽게 지치고 더 짜증을 내게 된다. 평소에는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일에도 화를 내는 상황이 많아진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고 과학이다. (사실, 감정은 과학이다.) 아마 봉준호는 ‘hangry(배가 고프다는 ‘hungry’와 화가 난다는 ‘angry’가 합쳐진 신조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많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컷, 한 컷을 촬영해야 하는 현장에서 모두가 집중해서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일의 능률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밥’일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에게는, 함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식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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