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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진 Feb 04. 2022

구도심에서 발견한 노포의 가치

돈까스 먹다가 만난 동네 #3

'멀다'라는 개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리적으로 거리가 꽤 떨어져 있다면 멀다고 해야 할까, 그냥 심리적으로 멀면 멀다고 해야 하는 걸까.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 힘으로 가장 멀리 가본 곳이 인천이었다. 한창 겁 없던 사춘기 시절, 중간고사가 끝난 친구들과 월미도를 갔었다. 그 유명한 바이킹도 타보고 유람선까지 만끽하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께 엄청 꾸지람을 듣긴 했어도 내 인생에서 최고 일탈이라면 일탈이었다. 정작 서울에서 차로는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인천은 나에게 뭔가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다. 해외로 나갈 때만 인천을 찾아서 그런가, 인천을 간다고 하면 마치 먼길을 떠나듯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 문 밖을 나서게 된다.


오늘은 동인천으로 돈가스를 먹으러 다녀왔다. 동인천역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월미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었다. 10년 전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동네에 다시 찾아왔다니, 내심 반가웠다.


오늘 들린 돈가스집은 명동식당, 해가 반쯤 들어오는 골목 안에 있는 조용한 백반집이다. 작년 여름에 왔을 때 가게 휴가 일정이랑 겹쳐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어서 조마조마했는데 문밖에 영업 중이라는 빨간 전광판이 보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명동식당 외관

날이 춥다 보니 안경에 김이 하얗게 서렸다. 슥슥 닦고 나니 보이는 메뉴들. 백반집이다 보니 메뉴는 다양하다. 가격은 만원 이하로 일반적인 백반집 가격 정도다. 이미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속으로는 돈가스라 정했기 때문에 다른 메뉴들은 자세히 보진 않았다. 주변을 봐도 다들 돈가스를 드시고 있는 걸 보니 맞게 선택한 듯싶다.

돈가스가 적힌 메뉴판

주문을 하면 사장님께서 즉석에서 돈가스를 만드신다. 냉장고에서 생고기를 쓱 꺼내시더니 돈가스 망치를 들어 쾅쾅 내리치기 시작하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경쾌한 망치소리가 반갑다. 돈가스를 튀기는 와중에도 혼자서 다른 음식들을 컨트롤하시는 걸 보고 있자니 존경스러울 정도. 여자 사장님은 직접 배달을 나가시는 듯, 철가방 두 개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철가방.

오랜만에 보는 철가방

돈가스가 나왔다. 밝고 노란 튀김옷에 빵가루 입자들이 큼직큼직하다. 첫 입에 파삭하고 씹히는 튀김옷이 좋았고, 물리적 연육을 거친 고기는 부드럽게 씹히면서 밑간이 잘 배어 있었다. 역시 즉석에서 만들어서 그런지 돈가스 본연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경양식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케요네즈 양배추 샐러드까지 좋았던. 백반집인 만큼 기본 반찬이 다섯 가지가 나오고, 공깃밥과 국물, 거기에 프라이까지 챙겨주신다. 든든한 집밥을 먹는 기분.

돈까스 (8,000원)

동인천에는 이런 노포들이 많은 것 같다. 오래된 경양식 집을 찾는다면 꼭 한 번씩 언급되는 잉글랜드왕돈까스도 바로 가게 근처에 있다. 인천 중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구도심이라 그런가. 동네를 걷다 보면 색이 바랜 간판들이 걸린 오래된 가게들은 물론, 빈 건물들과 낡은 여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세월이 멈춰 있는 동네다.


18년도부터 이 일대에서는 개항로 프로젝트라고, 오래된 동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옛날 병원 건물을 개조해 만든 카페(브라운핸즈)나 남녀노소 아우를 수 있는 전기구이 통닭(개항로 통닭), 낡고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지역과 상생하는 활성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야 너도나도 집중하는 로컬의 힘을 빠르게 알아채고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카페 브라운핸즈 외관 / Canon AF35ML, FUJI C200

개항로 프로젝트에서는 노포가 가진 매력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노포는 오랜 세월을 지켜온 만큼, 단골손님이나 새로운 손님이 편하게, 친숙하게 다가갈  있는 메뉴들이 있고  방문에도 낯설지 않은 분위기가 있어 금방  공간에 녹아들게 하는 끌림이 있다. 어디에서도 흉내내기 힘든,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이런 장소성이 담긴 노포들과 같이 협업을 하고, 맛진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노포를 소개하는 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가 있다. 관심 밖으로 팽개쳐졌기 때문에 보존되었다는 것. 그때는 우리 곁에 당연시하게 있던 가게들이 이제는 세월의 힘을 업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누군가의 관심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멀게만 느껴져서 인천에 오길 머뭇거렸다면 이런 동네, 이런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돈가스를 찾아 동인천에 왔다가 노포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 같다.


돈까스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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