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카 Sep 21. 2019

공주님 오 나의 공주님

조금 부담스러웠던 터키 여행

터키 여행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풍경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중 하나는 이스탄불의 어느 저녁,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에서 에페스와 와인을 실컷 마시고 나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을 걸었던 기억이다. 친구와 나는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가벼운 취기는 우리를 계속 웃게 했다. 우리는 지나가던 개를 보고도 웃고 조금 특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보이면 곧바로 머리를 맞대고 숨죽여 웃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고 두 번째로 맞이하는 밤, 앞으로의 여정이 가득 남아있었기에 마음이 여유로웠다.


"안녕, 너희는 어디서 왔어?"


그때 누군가가 우리의 사이로 성큼 들어왔다. 이스탄불에서 숱하게 보았던 평범한 젊은 남자였다. 영어를 조금 할 수 있는 내가 나섰다.


"한국에서"
"그래? 내가 맥주 한 잔 사고 싶은데 같이 놀지 않을래?"


오, 이런 게 바로 헌팅이란 건가. 친구랑 나는 반사적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눈빛을 교환하지 않아도 난 그녀의 의견을 알 수 있었다. 친구는 영어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걸 힘들어했고 우리 둘이서도 충분히 기분이 좋은데 굳이 모르는 사람과 함께 영어의 스트레스를 느낄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거절할 거였지만 난 얘가 몇 살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사실은 얘는 우리가 몇 살인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난 스무 살이야"


세상에. 띠동갑이다. 띠동갑!!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은 액면가보다 나이가 더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20대 중반이지 않을까 추측했는데 실제로는 그 보다 더 어렸다. 완전 애기다. 애기.


"너, 우리가 몇 살일 거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자애가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온 대답은 우리를 익룡으로 만들었다.


"음, 열여덟?"
"꺄~!"


이게 아부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우리가 너무 좋아하며 연신 땡큐! 를 외치자 그는 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시끄러운 여자들은 정체가 뭘까?를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러게 외국인에게 함부로 말 걸면 위험하단다. 애기야. 그는 이후에도 나이를 조금씩 올려가며 우리를 웃겼다.


"아니야? 스무 살? 그것도 아니야? 스물둘?"


어쨌든 땡큐다. 땡큐.







이후에도 터키의 여러 도시를 도는 동안 헌팅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여행 가기 전 블로그를 보며 정보를 모을 때마다 터키 남자들이 추파를 계속 던진다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 다들 부지런하다. 그중 한 명은 내 친구에게 진짜로 반했다. 그녀가 같이 놀지 않겠다고 하자 굳이 친구의 직업을 물어보았다. 그녀가 웹디자이너라고 하자 '오 내가 지금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게 있는데 너에게 맡기고 싶어. 제안 메일을 보내도 될까?'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메일을 보냈다. 제안은 하나도 없고 '넌 너무 아름다워. 넌 너무 예뻐'로 가득한 메일을.


우리는 여행 중간에 안탈리아라는 도시로 갔다. 그곳에서 3일간 아무것도 안 하고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장기여행 중에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안탈리아는 터키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고 은퇴한 유럽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도 나이 많은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호텔로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밥 먹을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고 있었는데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레스토랑 앞에서 열렬히 우리를 반겼다. 아니, 거기서 먹을 생각은 아닌데요. 평소라면 냉정하게 쳐냈을 나는 어쩐지 그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냐하면 그 아저씨가 너무 우리를 반겼기 때문이다. 손님을 부르는 호객 행위가 아니라 마치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조카를 반기는 것처럼.


아저씨는 매우 친절했다. 메뉴를 설명할 때도 매우 성의 있었고 다정다감했다. 난 이런 무해한 친절함을 가진 사람에게는 쉽게 무장해제가 된다. 자연스럽게 나의 영어도 부드럽게 변한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자 아저씨도 내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요. 공주님. 우리 레스토랑에서 오징어튀김을 안 먹으면 매우 슬플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아저씨는 나를 '프린세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프린세스'를 말하는 그 말투가 마치 귀여운 조카 또는 이웃집 아이를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장난기도 섞인 것 같았다.


"야 지금 저 아저씨 너를 공주님이라고 하는 거야?"
"나도 아니까 닥쳐"


친구는 그 후부터 여행 내내 나를 프린세스라고 불렀다. '프린세스~! 우리는 트램을 타야 해요!', '프린세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던 남자의 흉내를 냈다. '오 너는 너무 아름다워. 넌 너무 예뻐! 유아쏘 뷰티풀~!' 누가 더 수치스러운지 경쟁하며 여행 내내 웃기 바빴다.


기분 좋게 레스토랑을 나왔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그 레스토랑은 호텔 골목 입구에 있어서 우리가 외출을 할 때나 호텔로 돌아올 때 그곳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뚱뚱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온몸을 흔들며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오~프린세스! 마이 프린세스!!!"


아, 왜 수치심은 나만의 몫인가. 그때마다 친구는 웃기 바빴고 난 어색하게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얼굴이 좀 더 두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감나무 흔들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