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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Apr 19. 2020

오타쿠는 돌고 돈다.

패션도 돌고 취미도 돌고 내 인생도 돌아버릴 지경

나는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평범한 어른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남들이 알아주는 문학소녀였다.





여기서 어렸을 때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를 말한다.





책에 빠진 것도 책을 손에서 놓게 된 것도 이유는 딱 하나, 심심해서였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난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덕분에 전학까지 했는데 이미 1학년 막바지여서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이미 친한 친구들이 있는 아이들은 곧 겨울방학이 시작하는데 이제 막 전학을 온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갔어야 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더 사회성이 없었다.



겨울방학인데 놀 친구는 한 명도 없고 부모님은 맞벌이로 매우 바쁘셨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아빠는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어린이용 소설책을 한 아름 사 왔다. 조그마한 3단 책장을 꽉 채울 정도였다. 나는 3단 책장의 책을 하나씩 독파했다. 보일러를 잔뜩 틀어놓은 집에서 8살의 나는 귤을 까먹으며 내내 책을 봤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했다. 책을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건,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부모님이 매우 좋아하셨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년이 되어서 새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때도 집에 오면 책을 읽었다. 중학생이 되자 헤르만 헤세를 읽으며 스스로 문학소녀가 된 듯한 기분에 빠졌다. 도무지 헤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는 `낭만`에 빠져 계속 책을 읽었다. 이 시기에 많은 고전 문학책을 독파했고 퇴마록, 드래곤라자 같은 판타지 소설에도 빠졌다.



대학생이 되고 난 또다시 심심해졌다. 과 친구들하고는 어딘가 주파수가 잘 맞지 않았다. 입학할 때부터 전과를 목표로 해서 과에 미련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태생이 아싸인 나는 과방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 갔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러 갔다. 그러다 5층에 꽤 큰 규모의 시청각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청각실에는 밝은 형광등 빛 아래 PC방처럼 많은 컴퓨터가 칸막이 사이사이 늘어서 있었다. 시청각실 데스크에서 DVD 목록을 살피고 보고 싶은 DVD를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대여해준다. 그럼 DVD를 컴퓨터에 넣고 감상하면 된다.



나는 여기서 그만, 미드 프렌즈를 만나버렸다. 와, 이건 신세계였다. 처음 1-1편을 보며 윽, 옷이 왜 저래 하며 낯설어하던 나는 금세 빠져들었다. (당시는 2004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프렌즈는 시즌 초반은 옷이 매우 촌스럽고 후반으로 갈수록 나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완전히 반대더라. 패션은 돌고 돌고 세월은 빠르게 흘러간다) 2시간 정도 공강일 때마다 난 시청각실로 달려갔다. 사방이 뻥 뚫린 시청각실에서 난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웃음을 참았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흐느끼며 눈물을 닦았던 적도 있다. 프렌즈는 시즌 10까지 있으니 나에게 친구를 사귈 시간은 거의 없었다. 매일 시청각실에서 살았으니까.



지금이야 넷플릭스도 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렌트에서 쉽게 다운받을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미드가 그렇게 업로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시청각실에서 프렌즈를 다 보니 6개월이 지나 있었다. 후에는 위기의 주부들을 보았다. 와 이건 또 다른 신세계였다.



그렇게 나는 책과 멀어지고 미드와 가까워졌다. 미드를 보다가 일드도 봤다. 애니메이션도 봤다. 그때 일본어가 확 늘었다. 일드가 질리자 맙소사 영드라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그런데 영어는 안 늘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돈도 없고 무척 외로웠다. 외로움을 달래준 건 다시 프렌즈였다. 난 정말 프렌즈를 시즌별로 10번 이상은 본 것 같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 미드도, 영드도 보지 않았다. 시즌별로 퀄리티 차이가 너무 나기도 하고 진득하게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는 것보다 누워서 휴대폰 하는 게 더 좋았다.  커뮤니티의 유머란에서 킥킥대고 최근에는 유튜브를 많이 보았다. 책, 드라마, 영화 모두 긴 호흡과 큰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중독된 이후 나는 길게 집중하는 게 좀 힘들다. 짧은 짤을 보고 웃고는 금세 잊어버린다. 또 다른 재미를 찾아 트위터와 유튜브를 뒤지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생산물은 촌철살인 같으면서도 허공에 날아가고 뭔가 나와는 달라 보여서 부럽기도 하지만 결국 남의 삶이고 허상이다.



그런데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요즘 번역가가 되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직장인이지만 하루에 1시간은 꼭 공부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시작이라 꿈을 이루는 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토대를 쌓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번역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한 책을 사기 시작했다.



어제는 오지은 작가의 산문집 <익숙한 새벽 세시>를 읽었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챕터가 모두 나의 이야기 같아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잇대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차이점은 그녀는 뼛속까지 예술가여서 자신의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었고 난 오타쿠 기질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내 안의 고민을 파고들지 않고 다른 일로 해소하려고 했다. 외로울 때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내가 잘살고 있는지 조바심이 날 때마다, 내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나는 무언가에 빠져들었다. 그건 책이기도 하고, 드라마이기도 하고, 캔들이기도 하고, 글쓰기 수업이기도 하고, 여행이기도 하고, 번역공부이기도 하다.




패션이 돌고 돌아

취미가 돌고 돌아

인생도 돌고 돌아

시 제자리이다.



매번 나는 뭐가 그렇게 외롭고 심심하고 불안한지.



고민은 해결되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무언가에 빠져 있을 동안에는 고민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오타쿠가 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오랜만에 책에 푹 빠져서 읽으니 참 좋았다. 마치 나의 마음을 그녀가 대신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돌고 돌아서 결국 책을 다시 손에 쥐었다. 기분이 꽤 괜찮다. 아마 한동안은 책 오타쿠로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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