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학과에 다니면서도 정작 에세이 한 권 안 읽어본 시절의 경험담이다. 라면 끓이는 이야기도 훌륭한 에세이가 될 수 있다는 A교수의 말에 라면 끓이는 방법을 써서 과제로 제출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는 내가 잘 쓴다는 뽕(?)에 취해있을 때다.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 분말스프까지 넣었는데, 후레이크는 깜빡하고 못 넣은 이야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창피해서 더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나름 구구절절한 묘사를 욱여넣은 글이었다는 건 기억난다. "이건 글도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문장마다 짚어가며 면박을 줬을 A교수는 설명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화면을 넘겼다. 라면 끓이는 이야기도 에세이가 된다면서요. 따지고 싶었지만, 라면 끓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시비 붙었다간 망신만 당할 게 뻔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창피했던 그 기억이 내 첫 번째 에세이였다.
두 번째 에세이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그때 쓴 글이 따로 남아있지 않아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적은 내용인데, 그때가 체감상 몇 배는 더 감정적인 데다가 난잡하게 썼다. 고인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이 더 복받쳐 올랐던 것 같다.
그 글을 울면서 낭독했다. 복학생인 터라 두 학번 아래의 후배와 동기들까지 있는 자리였다. A교수는 내가 말을 못 이어나갈 때까지 낭독을 시켰다. 다소 악질적인 행태가 아닐까 싶다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일종의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이 무뎌졌다. 내가 더 이상 못 읽겠다며 포기하고나서야 A교수는 내 글을 이어받았다. "울고 싶을 때 안 울어야 좋은 글이다." 낭독을 마치고 나서 A교수가 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의 설움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글이 어떻게 좋은 에세이가 될 수 있겠냐고. 그런 글은 알지도 못하고 쓰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두 번째 에세이의 기억이다.
세 번째 에세이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쓰였는데, 나는 내가 다시 에세이를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다른 글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소설만 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회사 업무 시간에 몰래 쓴 일기로부터 세 번째 에세이가 시작될 줄은 짐작지도 못했다. 업무에 대한 불만, 쓰지 않고 살아간다는 결핍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잦은 우울감. 그것들을 짬뽕해서 쓴 글이 한 편 두 편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게 내 브런치의 글이 되었다. 그동안의 글이 대부분자괴감과 결핍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결핍의 표출이었고 감정의 배출이었다. 그래서 쓰는 동안 괴로웠고, 때론 힘들었고, 다 쓰고 나면 후련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에세이는 크게 세 단계로 변화해 온 것 같다. 무지의 글쓰기, 폭발하는 감정의 글쓰기, 결핍의 글쓰기. 이제는 그다음이 뭘지 궁금해졌다. 무엇을 담아야 좋은 에세이가 될 수 있지? 그건 아마도 이해의 글쓰기, 사랑의 글쓰기가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다음 단계까지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쓰기의 스킬보다는 정신적인 수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그전에 이루어져야 할 건 무엇보다 '내 안에 타자(他者) 들이기'가 아닐까 싶다.
A교수의 마지막 합평이 떠오른다. "네 글에는 타자(他者)가 없다." 그때는 그 말이 단순히 주관적 표현을 삼가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단순히 글에 대한 얘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5년이 넘게 걸리고 만 것이다. A교수의 말처럼 내 글에는 정말 나만 있었다. 다시 읽어봐도 대부분의 글이 그랬다. 항상 내 감정을 우선했고, 타자를 배제했고, 사랑할 줄을 몰랐다. A교수는 내가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납득시키고 교육한 거였다. 조금은 분했지만, 그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내 나이 서른까지도 미리 학습할 내용을 숙제로 남겨두다니. 아마 이 숙제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풀어야 할 난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