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sm의 추억 (1)

베트남에서 만난 Bill Bensley의 공간들

by Ring finger

우리는 지금 어디로 떠나는 걸까


10월. 아직 올해는 세 달이나 남았다 위안하고 있었는데 어김없이 벌써 문 앞에 서있는 이가 있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코리아 무려 2022년. 우리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며 외면하고 싶던 단어 '트렌드'를 이렇게 말끔히 정의한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일정기간 유지되는 다수의 동조

10대 자녀와 함께 돌아온 70년대생 X-Teen의 귀환, 개인으로 생존해야 하는 나노 사회의 심화 등 다양한 고민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던 중 '러스틱 라이프'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비대면 경제와 재택근무의 확산으로 일주일 중 5일은 도시에, 2일은 시골에서 생활하는 '5도 2촌'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 레이더에 심심찮게 잡히던 시골 빈집 리모델링 영상들, 빈집 큐레이션 플랫폼 '유휴'의 운영사 블랭크, 늦은 휴가를 보내고 싶던 가파도와 그곳의 현대카드 프로젝트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말이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가고 싶은 이 마음의 주인은 시골일까, 떠남일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다가도 '떠남'이란 단어에 대책 없이 설레는 충동을 달래다 꽤 오래 잊고 있던 그가 생각났다, Bill Bensley.


낯 섬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던 무렵, 회사, 베트남어, 골프 연습의 트라이앵글이 선사하는 단조로운 전형으로부터, 위치추적의 첨단기술과 흙먼지가 공존하던 그 길로부터 이따금 나는 나를 분리시켜야 했다. 일상의 소박함과 지루함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날 곳을 찾다가 그를 알게 되었다.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50개국 200여 개 특급 호텔을 파라다이스로 불리게 한 미국의 조경, 건축,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의 최신작이 밀집한 곳이 바로 이곳 베트남이었다. 때는 2020년 하반기, 외국인 관광객의 유입은 차단되었으나 내국인 관광객의 이동은 아직 자유로웠고 위기에 직면한 호텔들이 특별 프로모션에 돌입한 그 시절이었다. 호기심을 탐험으로 실행에 옮겨볼 적기였다. 그렇게 나의 Bensley 투어는 남부를 시작으로 북부를 찍고, 중부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의 팬이기도 했다가 안티로 돌아섰다가 화려함과 새로움에 압도되었다가 휴식 아닌 휴식에 지쳐버리는 변덕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다채로운 변주 속에서도 집요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현실에 옮겨놓은 그의 신념, '이상할수록 좋다 (The odder, the better)'는 메시지에는 그저 무방비인 채로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푸꾸옥 JW 메리어트 에메랄드 베이 리조트


베트남 남단의 섬으로 이웃국가 캄보디아에 꽤 인접한 곳에 위치한 푸꾸옥 (Phu Quoc)은 지난 2년간 내가 가장 사랑한 곳이자 Bensley를 처음 만난 곳이다. 제법 외진 위치로 예전에는 경비행기로 환승해야만 갈 수 있었던 그곳을 이젠 하노이 기준 3시간 만에 직항으로 갈 수 있었다. 코로나 초년도, 나를 보러 와줄 가족도 친구도 단절된 상태에서 시작된 여름휴가의 행선지는 뜻밖에도 피트니스 센터였다. PT와 킥핏과 필라테스, 요가로 범벅된 일정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스스로를 지치게 한 생애 최초의 극단적 휴가였다. 괜찮을 줄 알았던 그 무리한 계획은 결국 보상을 요구했고 살짝 불안한 절친 관계의 멕시코에서 온 친구와 연차 일정을 맞춰 푸꾸옥행 티켓팅을 마쳤다. 그런데 미묘한 우리 사이의 믿음만큼이나 날씨도 불안했다. 3박 4일의 일정 내내 비구름이 넘실거렸다. 얄궂게도 그녀의 생일을 포함한 예정된 일정 앞뒤의 날짜는 그런대로 괜찮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순간 나는 비열해졌다. 의리보다 멀쩡한 날씨를 원했다. 다소간의 고민 끝에 베트남인 직장동료 2명과 연합을 이룬 그녀에게 회사를 핑계로 파토를 고했고, 며칠 앞선 날짜를 골라 혼자만의 일정을 준비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해안의 케이블카와 다채로운 해산물 탐험은 이제 내 것이 될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끝내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비로소 마주할 자신이, 그런 용기가 생겨나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JW 메리어트 에메랄드 베이. 베트남에 있는 동안 여긴 꼭 가야 한다는 일장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감동의 실체가 궁금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1박에 50만 원이 넘는 금액은 부담스러웠다. 그랬던 숙박료가 30만 원대로 내려앉은 시점이 온 것이다. 그래, 마지막 1박은 이곳에서 해보자는 결심이 섰다. 나머지 2박은 좀 더 현실적인 금액을 제시하는 인터콘티넨탈 롱비치로 결정했다. 오직 공항과 리조트만으로 구성된 이번 일정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리조트였다. 사랑한다고 고백했건만 결국 내가 만난 푸꾸옥은 섬의 1%가 될까 말까 한 이 두 곳과 그들이 점유한 프라이빗 비치, 무리한 라운딩이었던 골프클럽, 공항을 오가던 거리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365일 공사 중인 일상의 소음과 미완성의 환경에 지쳐 인공적일지라도 말끔하게 차려진 풍경에서 잠시 머물고 싶다는 옹졸한 욕구가 나의 계획을 정당화했다. 모든 걸 이해할 순 없어도 보는 것만으로 환기를 주던 낯선 예술에 대한 그리움 역시 Bensley의 사유를 캐내 보겠다는 의지에 불을 지폈다.


고즈넉했던 롱비치가 해본 적 없는 템플 스테이를 연상시켰다면 에메랄드 베이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많은 인파로 붐비던 축제 무렵의 테마파크였다. 가족을 넘어 친척 단위로 모여 늦은 휴가를 즐기던 베트남 사람들과 적지 않던 중국 사람들, 그 외의 나 같은 외국인들이 시절이 무색하게도 한데 모여버렸다. 그 소란과 열기 속에 잠시 넋을 잃었지만 과연 그의 명성만큼 '캠퍼스'라는 컨셉에 충실한 건물 면면의 독특한 디자인과 아기자기한 역할분담, 비비드 한 컬러의 환상적 조합, 이색적인 조경과 조형물의 어루어짐을 발견하는 헤맴은 참 오래간만의 즐거움이었다. 웰컴 드링크를 건네고 버기 차를 운전하여 방을 안내하던 스텝의 레이어링 된 의상, 머리 깃털 장식 하나에도 디자이너의 섬세한 정성이 보였다. 야무진 1박을 위해 리조트 공간을 탐사하는 첫날 오후와, 수영장에서 노을을 즐기는 저녁, 이름만큼 투명하던 에메랄드 바다를 위한 이튿날 오전으로 일정을 3 등분하며 시간을 아꼈다. 360도로 바쁘게 오가며 쉴 새 없이 곤두섰던 시각은 빛이 사라진 밤에 이르러 마침내 휴식할 수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그 밤의 텅 빈 로비에서 Bensley 건축 사유의 중심 'Escapism'을 만났다.


Bensley 대학교 중에서도 비밀스러운 고풍이 감돌던 이 공간의 컨셉은 도서관이었다. 높은 층고와 하얀 마감재, 양면의 문으로 개방감으로 살려 실면적보다 넓은 공간감을 연출하였고, 키가 높은 책장과 가구들을 활용한 서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인테리어용인지 열람용인지 구분이 모호하던 고서들을 펼치니 물건의 명세서와 영수증, 수학 계산식들이 영어 필기체로 가득 적혀있었다. 그런 책들 속에서 의도된 것이겠지만 'Escapism' 책을 발견했다.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계단 위의 소파에 앉아 Bensley의 'Odd'한 세계관이 구현된 베트남과 태국의 공간들을 천천히 탐사할 수 있었다. 일상을 둘러싼 일체의 관념과 전형으로부터의 탈피. 그것이 호텔과 리조트라는 비일상적 공간을 찾은 이들에게 Bensley가 선사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튿날 아침 에메랄드 베이의 해먹에 누워 반짝이는 수평선과 야자수 잎을 번갈아 바라보다, 문득 Bensley의 정신과 교감해보자는 충동으로 빨간 카약 보트 앞에 섰다. 이 많은 인파들 속에서 산책과 휴식 외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던 해변을 유유히 즐겨보고 싶었다. 에어 팟을 귀에 꽂고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책까지 가방에 담아 에메랄드 바닷속으로 노를 저었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수평선 너머의 배들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내가 누릴 수 있는 바다도 점점 넓어지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해변을 바라보니 내가 머물던 대학교가, 다채로운 빛깔의 리조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저 가만히 쉬는 것으로 족하던 혼자만의 여행에 건축가의 사색을 동경하고 소심한 일탈을 더해가며 나만의 에피소드를 늘려갔던 10월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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