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sm의 추억 (2)

베트남에서 만난 Bill Bensley의 공간을 떠올리며

by Ring finger

베트에서 만난 Bill Bensley의 공간을 떠올리며


사파 호텔 데 라 쿠폴 엠갤러리 바이 소피텔


나와 같은 날 골프 레슨을 시작한 우연으로 생애 첫 라운딩을 함께 했던 골프 동기는 나보다 일 년 먼저 베트남에 왔던 2살 어린 동생이었다. 근교 도시로 출퇴근하는 직장생활 중에도 베트남어 공부, 수영, 필라테스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기며 부지런히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다. 이미 코로나 이전 베트남 주변국까지 많은 곳들을 여행했던 그녀와 아직 많은 곳을 가보진 못한 내게도 위시리스트였던 '사파'를 주말을 이용해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하는 약 5시간의 야간 침대 버스를 타고 베트남 최북단에 위치한 고산지대 사파로 향했다.


굽이굽이 좁은 도로를 오르며 비몽사몽 간에 바라본 창가에 사파의 대표적인 계단식 논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이윽고 도착한 사파는 온통 안갯속에 휩싸여 있었다. 완연한 로컬 관광지의 풍경 속에서 유독 시선을 압도하던 건물이 우리가 1박을 보낼 호텔이었다. 사파의 100여 개 호텔 중 유일한 5성급 호텔인 이곳의 컨셉은 1920~30년대 프랑스 오트 꾸튀르 시대와 하이엔드 패션이었다. '인도차이나'라 불리는 프랑스 식민시절이기도 하기에 베트남 사람들에겐 민감할 수 있는 시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이곳을 찾은 대다수 방문객들은 한껏 아름답게 드레스업 한 20대 베트남 여성들로 과감한 포즈를 취하며 공간의 컨셉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한편 우리는 멋진 호텔 공간에 대한 정보는 있었어도 수영복 정도 밖에는 의상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사파의 명물로 알려진 케이블카를 타고 베트남 최고 높이의 산 '판시판'을 오르며, 소수민족이 산다는 '깟깟마을'을 먼저 둘러보자는 생각에 아침 7시의 이른 체크인을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그러나 날이 밝아도 여전한 안갯속에서 예상 밖의 추위에 떨던 동생의 바람막이까지 구매한 뒤 출발했던 판시판은 코로나 영향으로 케이블카 운행을 중지한 상태였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깟깟 마을로 향했던 택시는 좁은 길목에 무너져 내린 돌 무 더미로 인해 더 이상 진입이 불가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정말 호텔 밖에 없었다. 사파 탐사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으려 애쓰며 호텔의 공간을 탐사하는데 집중했다. 고급 비스포크 부틱을 연상시키는 로비를 지나 붉은 조명과 초록빛 대리석 기둥, 푸른 수조의 대비가 화려했던 수영장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호텔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중정에 조성된 정원을 산책했고, 아티스틱한 라운지 바에서 저녁을 보냈다. 거대한 무용수들의 군무를 보는 듯한 인테리어의 조식당에서 느긋한 아침을 즐겼고 괜히 달려보고 싶게 했던 체육관에서 운동마저 마쳤다. 오로지 호텔에만 머물러야 했던 그날의 날씨 탓인지 Bensley의 3개 호텔과 리조트를 모두 다녀온 후, 인테리어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사파의 엠갤러리였다. 규모 면에서도 드넓은 리조트에 비해 좁은 공간에 구성된 호텔이기에 보다 응축된 이미지로 여러 공간들이 합쳐지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를 옛 시대로 데려가는 듯한 엘리베이터와 그 주변의 작은 오브제들, 벽에 걸린 이미지들 조차 섬세하게 하나의 컨셉으로 모아진 컬렉션 같았다.


그래도 가까운 시내 한 바퀴 정도는 돌아보자며 나간 산책 길에 쌀국수 한 그릇씩을 마주하고 너무나 화려한 공간에선 미처 꺼낼 수 없었던 마음속 고민들을 나눴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베트남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한 비전, 앞으로 살고 싶은 삶의 방향과 지금까지의 변화 같은 것들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지 예상하고 결정하는 건 누구도 아닌 본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분명했던 한 가지는 그저 당황스럽던 코로나가 영원하지 않은 기회를 자각하게 하고 망설이던 우리를 뛰쳐나오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다낭 인터콘티넨탈 썬 페닌슐라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던 연말 무렵 조금 특별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다소 애매했던 친구들의 관계를 재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에 살짝 심란했다. 영어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멕시코에서 온 동갑내기 친구와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었고 이따금 그녀가 알게 된 서구권의 다른 객원 친구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주로 바에서 어울렸다. 한편 최초의 영어 모임에서 만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었던 Ann을 통해 파생된 아시안 그룹이 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일본인 Mina와도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러다 그녀의 전 직장 동료와 현 직장 동료인 두 명의 일본 친구들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이곳에 왔던 Ann의 환송회 날 뜻밖의 감정에 복받쳐 테킬라에 손을 대었다가 주인공도 아닌 내가 블랙아웃이 돼버리면서 얼떨결에 이 두 친구와도 가까워지게 됐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에도 멕시코 친구와 아시안 그룹의 연합을 추진해보았으나 결국 이브와 당일 모임으로 나뉘었던 전력이 있었다.

이번엔 Mina의 귀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3명의 일본인 친구들은 마지막 추억을 위한 공간을, 나와 멕시코 친구는 새해맞이를 위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두 그룹이 다낭이라는 공통의 결론을 내렸고 올해 마지막 날은 함께하자며 서로의 숙소를 확인했다. 먼저 일본인 친구들이 선택한 곳이 썬 페닌슐라였다. 베트남의 Bensley 리조트 중에서도 가장 고가에 속하는 곳으로 나와 멕시코 친구도 1박이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워낙 프라이빗한 공간에 위치한 곳이라 시내를 탐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심지어 멕시코 친구는 3번째인 다낭이었지만 초행자인 나를 위해 오토바이를 대여하여 둘러볼 곳들까지 계획을 세우던 참이었다. 결국 나의 골프 욕심까지 더해져 시내와 골프장으로의 접근성이 우수한 두 곳의 호텔을 선택하게 되었다.


각자의 일정을 보낸 뒤 2020년의 마지막 날 일본인 친구들의 초대로 우리는 썬 페닌슐라를 방문했다. 이름 그대로 야생 원숭이들을 볼 수 있는 몽키 마운틴의 끝자락에 전면의 바다를 바라보고 위치한 이곳은 바다, 지구, 하늘, 천국의 4개 컨셉을 층마다 달리 적용하였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 바라본 리조트의 전경은 붉은 빛깔과 검정이 대비되어 왠지 모르게 일본의 신사를 연상케 했다. 라운지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푸니쿨라에 올라 그녀들의 방으로 이동했다. 바다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방만큼이나 넓게 마치 거실처럼 외부 공간을 구성한 점이 인상 깊었다. 그곳에서 다가오는 나와 또 다른 일본인 친구의 생일, Mina의 마지막 베트남 여행을 함께 기념했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도시를 떠나 바닷가의 테라스에서 함께 소원을 빌고 Uno 게임과 치킨댄스 벌칙을 수행하던 그 밤, 마침내 내가 바라던 두 그룹의 연합도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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