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메모러블 발렌타인

잊지 못할 2월의 그날

by Ring finger

당연하지 않았던 생존


업무로 바빴던 한 주의 끝, 마음껏 게을러지고 싶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메신저로 전달된 사진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입구는 가로막혔고 출입금지가 적힌 빨간 테이프가 둘러진 그곳은 내가 살고 있는 레지던스였다. 같은 건물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의 트레이너가 회사에서 받은 것이라며 보내온 것이었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이 술렁였고 일본인 커뮤니티에 따르면 일본에서 입국하여 격리를 마치고 이곳으로 온 50대 남성이 투숙 이틀 만에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급히 리셉션으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이미 뒤숭숭해진 입주민들이 웅성이고 있었고 레지던스 직원들은 안내가 있을 때까지 방에서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제부터 난 이 방을 나갈 수 없다. 이렇게 갑자기 봉쇄가 시작되면 언제 다시 나갈 수 있을까. 그제야 눈에 들어온 오늘의 날짜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였다.


결국 그날로 예고 없던 2주간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사건 당일 점심부터 순차적으로 지하 주차장에 모여 전 레지던스 입주민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감염 여부 검사를 실시했다. 2주 내내 지역 병원에서 파견 온 인력이 상주하며 매일 오전 각 방 인원의 체온을 측정했다. 이 모든 상황을 회사에 보고했고 곧 자택 근무에 들어갔다. 당장 비축해놓은 물과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았다. 얼마간은 버티더라도 2주는 무리였다. 소문이 퍼져 나가던 사건 당일은 어느 음식점도 슈퍼도 이 근처에 오기를 꺼렸다. 다행히 곧바로 앞 슈퍼에서 통제선까지 상품을 배송하면 레지던스 직원들이 각 방문 앞까지 배달해주는 방식으로 생존 매뉴얼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당장의 식사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문틈으로 전달된 신청서에 각 방의 인원과, 아침/점심/저녁 중 원하는 끼니와 원하는 메뉴를 표시해두면, 그 시간에 맞춰 문 앞으로 도시락이 배급되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휴지와 쓰레기봉투를 신청할 수 있었고 매일 지급되던 수건은 세탁하여 재사용해야 했다.


모두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물 통제의 기간 동안 레지던스 직원들은 이곳에 함께 상주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200여 개 객실의 식사를 전달하고 문 앞의 쓰레기를 수거하며 입주민의 체온을 확인했다. 사건 무렵부터 근무했던 직원들 중 일부는 이미 고인과 밀접 접촉하여 바로 병원으로 이동되기도 했다. 적은 인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던 그들의 수고와 빠른 매뉴얼 수립 덕분에 나의 2주는 준비 중이던 보고서 작성과 함께 수월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곳에서 비슷한 이유로 머물고 있던 이름 모를 누군가의 변고가 던진 파장은 내 안에서 점점 더 퍼져나갔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생명은, 시간과 기회는 당연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 이 삶을 위해 난 달라져야 했다. 더 이상 허황된 소비에서 의미를 찾고 세월을 방관하며 진정 원하던 꿈을 미루기만 하며 살 수는 없었다.




오랜 연인, 리볼빙과의 결별 선언



직장인이 되고 난 뒤의 여름은 무조건 유럽이었다. 별도의 예산 책정도 필요 없었다. 내 손에 일용할 카드만 있다면. 비행기 티켓이든 호텔이든 일단 질러보는 전투적 탕진으로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를 보상받고 싶었다. 그렇게 강렬하게 시작된 리볼빙과의 만남은 애증 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강력한 인력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옷은 핏과 원단이 생명이니 반드시 직접 만져 보고 입어봐야 한다는 핑계로 최소 백화점 브랜드만 고수했다. 더 나아가 디자이너 브랜드, 편집샵에서만 소량 입고되는 외국 디자이너 브랜드. 꼭 명품이 아니어도 내 등허리를 휘청이게 하는 취향은 여러 곳에서 길러낼 수 있었다. 이것까지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래,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며 다시 매장으로 향하는 그 순간의 수직 상승하는 엔돌핀에 중독되었다. 문제는 카드를 건네고 마침내 그 옷을 손에 넣었을 때 엔돌핀을 급감시키는 반 박자 느린 현실인식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첫 일 년까지도 리볼빙의 인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코로나 직전의 설 명절까지도 파리의 겨울 세일에 올인했다. 잘 안 맞아도 반송 못할 온라인 쇼핑 상품을 항공 택배로 받아보길 몇 차례였다. 예견된 실패를 굳이 하고야 마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당시로는 만족할 길이 없던 현실에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더 이상 리볼빙에 질척이는 미저리가 되지 않으려 노력 중인 지금에서야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 목표를 상실한 채 시간이 흘러넘치는 듯한 여유로움의 착각 속에서 근본 없는 소비의 악마는 자라난다는 것이다.




내게 가장 맞는 루틴의 시작, 운동


오랜 기간 담을 쌓고 살아온 '운동' 마저 리볼빙으로 해결하려던 어리석은 날들이 있었다. 운동을 통한 자기 관리라는 게 피트니스 센터의 회원이 되고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착용하며 꾸준히 PT를 받는 것이라 믿고 정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일단 출석 도장을 찍으면 무엇을 위한 동작 인지도 모른 채 PT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정해진 횟수를 채워나갔다. 두 달에 한 번쯤 인바디의 숫자로 그간의 복종이 옳았는지 자가판단 후 새로운 프로그램을 등록할지 여부를 결정했다. 베트남에서도 버리지 못한 그 관성은 코로나 이후 거듭된 다중시설의 영업중단 끝에 종말을 고했다.


PT 선생님이 없는 집에서 스스로 운동을 하게 되기까지 조금 다른 고민의 여정들을 우회해왔다.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란 무라카미 하루키, 허리케인이 와도 새벽 4시 반의 체육관을 고수한다는 드웨인 존슨, 대학 수업과 공사장 알바를 하면서도 하루 5시간씩 운동하여 바디빌딩 챔피언이 되었다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동기부여 영상을 탐닉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의 장그래에게 스승님이 남긴 미생의 대사에 이르렀다.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왜 내가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듯한 운동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납득한 후에야 비로소 내 몸 상태와 수준에 맞는 운동들을 고를 수 있었다. 단순히 살이 빠지고 예뻐지니 버텨라라는 호소보다 어떤 근육을 써서 어디에 도움이 된다는 효능과 원리를 설명해주는 유튜버를 찾게 되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로 시작하여 점차 강도 높은 영상들로 업데이트해나갈 수 있었다. 운동할 때 바라보는 거울 옆으로 오늘 운동을 했는지 여부를 표시하는 달력과 스스로를 부셔가며 토대를 쌓는다는 드웨인 존슨의 문장들을 옮겨 붙였다.


직장인으로서 가장 자유로운 아침과 저녁의 컨디션을 견주어보고, 아침에 쓴 글과 저녁에 쓴 글의 민망함을 비교해보면서 운동을 통해 기른 체력으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이켜보았다. 그 고민의 끝은 역시 '글'이었다. 혼자만의 일기 그 이상이 되고 싶은 나의 글이 어떤 모습일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내게 가장 맞는 온도로 예상되는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고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날 수만 있다면 하루 중 가장 맑은 정신으로 잡념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과잉된 감정이 기승을 부리지 못할 순간은 아무래도 '새벽'이었다. 4시 반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묵상과 함께 감사한 일 3가지를 적은 뒤 시작되는 창작의 시간. 오래도록 원했던 쓰는 인간의 삶을 위해 조금 버겁지만 시작해본 모닝 리추얼이었다. 이 루틴을 이어가자면 평일 저녁 약속은 최소화해야 했고 퇴근 후 요리를 피한 간단한 식사와 영어회화 수업에 이어 요가 메트를 깔고 시작되는 운동 1시간의 나이트 리추얼을 지켜야 했다. 아무리 늦어도 11시 전에는 잠들기 위한 혼자만의 바지런함을 떨자니 알고리즘에 내맡겨지던 유튜브 시간과 채널까지도 선별해야 했다. 몇 달이 흐른 지금까지도 무시로 흐트러지는 나 자신에게 되뇌는 사실은 작가의 시간과 체력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운동을 하고 빨리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


취준생의 스펙 쌓기와 무관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시도했던 몇 안 되는 봉사 중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활동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학습을 도왔던 일이었다. 그 기억 때문이었는지 오랫동안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인 동료에게 이런 봉사 기회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코로나가 발발하고 도시가 봉쇄되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며 부탁한 사실마저 잊어갈 무렵, 바로 그 동료에게서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본인의 첫째 아이 한국어 공부를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십여 년 전 베트남으로 왔던 그는 이곳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어느덧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되었다.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와 베트남어가 오가는 부부 사이에서 첫째 아이의 모국어는 베트남어가 되었고, 오직 아빠와 대화할 때만 약간 어설픈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얼굴을 보는 동료의 아이라 부담이 없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세 달간 토요일 오전 10시의 루틴이 추가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부분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지만 동료는 한국학교 입학을 고려하고 있었다. 당장 학교 생활과 수업에서 필요할 글자를 읽고 쓰는 훈련이 시급해 보였다. 이 단계의 수업은 나도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한글의 자음과 모음 카드를 만들어 파우치에 담아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카드들을 조합하여 이미 말하고 있는 그 글자의 소리와 형태를 연결시키는 연습에 집중했다. 처음엔 얌전하게 따라오는 것 같던 아이는 점점 수업과 관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용과 상어의 계보를 내게 일러주며 그 글자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다 우리의 공부방이던 레지던스 라운지의 정리된 커튼을 다 풀어 젖히다가 커피 머신의 이곳저곳을 눌러보기 시작했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게 이런 말인가 떠올려보며 공부 말고도 아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목표한 공부량을 끝내면 라운지에 있던 체스로 어린이용 게임을 두세 판씩 두는 것으로 협상을 지었다. 덕분에 나조차 몰랐던 체스 말들의 이름과 기본 세팅 정도는 익히게 되었고 그것을 한글로 함께 써보면서 공부반 놀이반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연휴를 보내고 오랜만에 만난 아이가 마침내 동화책 한 권을 완독 하는 걸 확인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동료의 가족들과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이렇게 놀라웠던 학습 결과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본인도 문장으로 말할 수 없는 한국어를 아이에게 가르치기 위해 동료의 부인이 매일같이 한국어 교재 음성 파일을 들려주고 그대로 읽고 쓰는 연습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놀다가 공부하는 것으로 이런 기적이 있을 순 없었다. 아이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싶었던 동료와 자신에게도 외국어인 한국어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렇게 가르쳐왔던 부인의 마음이 뭉클하게 와닿았다. 때로 과소비하는 게 아닌가 싶던 나만을 위한 시간을 아주 잠시 나눈 것만으로 이런 따뜻한 변화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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