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시기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정말로 힘들게 보내는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2016~17년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여전히 힘이 되어준 가족들이 없었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시기였습니다. 제 정체성이 흔들리고, 믿었던 사람들이 언제나 제 편은 아니라는 사실은 저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2018년 2월에 출발했으니,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길이 준 깨달음들이 지금도 제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시작하는 프랑스 길을 걸었는데, 그 길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약 150km쯤 떨어진 곳에 오 세브레이로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마을이라, 마지막 고비라고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저는 눈길을 걷느라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마을에는 산타 마리아 라 레알이라는 9세기 경에 처음 지어진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성당은 오래된 것뿐 아니라, 성체와 성혈의 기적으로 유명합니다. 14세기 순례자들의 신심을 가볍게 여기던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중에 성찬의 전례 때 밀떡과 포도주가 실제 사람의 살과 피로 변한 기적이 일어난 곳입니다. 성당에는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성체와 성혈이 별도로 모셔져 있습니다. 항상 징표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는 성체 성혈 대축일이 되면 오 세브레이로의 성당이 생각이 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24
저는 성체와 성혈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랑과 가르침으로 세상을 구하셨지만, 끝내 목숨까지 제물로 바치셨던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나면 계약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매번 죄를 반복하는 우리를 단죄하실 때마다 그리고 용서하실 때마다 계약을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시고, 홍수 이후에 무지개를 보여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도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다는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계약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계약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계약을 돌아보게 하지만, 약속을 지키면 계약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기도 합니다. 결혼식에서 혼인 서약을 하지만, 서약한 내용 때문에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서약을 지켜야만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뿐인 아드님을 보내신 하느님과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우리와 맺으신 계약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계약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켜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년여 전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한 날 일기를 다시 열어보니, 하느님의 계약을 되새기게 하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순례길의 화살표가 쉬운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길이 편안한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