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맘가는대로 May 24. 2024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상속이라는 말이 어떨 때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과거에 쌓아 놓은 자산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의미로 보면 상속을 통해 이 세상은 조금씩 발전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자산을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온 모든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넓혀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거창한 기업이 아니어도 몇 대에 걸쳐 내려오는 가업도 있습니다. 2대, 3대를 이어오는 식당도 있습니다. 종갓집에서 전승되어 오는 전통도 상속받은 자산입니다. 재물만 물려받는 경우에는 책임이 다소 적을 수도 있지만, 가업을 물려받는다면 그로 인한 수고로움도 함께 물려받아야만 합니다. 그 수고로움을 물려받는 것이 싫거나, 그 수고로움을 견디어낼 역량이 부족한 경우라면 아무리 훌륭한 가업이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상속을 받은 사람이 수고로움과 책임을 소홀히 하면 상속받은 자산이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왕조시대의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위가 자식들에게 이어졌지만, 권력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올바르게 끌고 가야 하는 어마어마한 책무가 함께 했습니다. 수고로움과 책임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느끼고, 고민하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속이라도 거저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라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17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8, 17) 초대교회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신앙이 처음 싹트던 박해시절에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때로는 목숨마저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속을 받기 위해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멀리했었습니다. 과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저는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는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그곳, 고통은 없고 웃음이 가득한 그곳, 천사들이 노래하고 맹수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살아서 누리는 행복이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이 죽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누리고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뜸에 감사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소소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늘어나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득한 곳, 하느님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나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 주는 희망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로 서로 존중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나누었던 그곳은 이미 하늘나라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고난은 박해시대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목숨을 요구받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난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을 방해하는 유혹들을 이기는 것 말입니다.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거나 때로는 혼자 가려고 하는 마음,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앞에 두려고 하는 유혹, 필요한 것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불필요한 것까지도 차지하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고난은 아닐까 합니다. 목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실 성령이 오시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완성하신 것을 기억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빠르게 변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 우리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상속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요구임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전 26화 성령 강림 대축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