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이종선 / 아이티에스뱅크
재두루미의 계절은 단순한 철새의 이동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선 인간이 다시 한번 ‘올려다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재두루미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찬바람이 논과 습지를 쓸어내리면 파주와 연천, 그리고 철원의 드넓은 평야 어디쯤에서 그들의 묵직한 날갯짓이 공기를 흔든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그들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녀석들이 나를 반겨 줄지, 혹은 경계의 눈빛을 보낼지는 알 길 없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곳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빠질 만큼 경이롭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운 어떤 ‘존재감’이 그들에게 있다.
재두루미 무리가 하늘을 가르며 내려앉는 순간, 풍경 전체가 그들의 무대를 위해 준비된 듯한 착각이 든다. 긴 목과 다리를 가진 그 우아한 생명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땅의 영혼과 함께 살아온 토템처럼 느껴진다. 고대 한반도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새를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영적 존재로 여겼다. 그 신앙의 흔적은 지금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사당 벽화, 전통 문양,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새는 늘 길조이자 이상적 존재로 그려진다.
재두루미가 춤을 추듯 천천히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우리 조상들이 그 동작을 본떠 전통무용을 창작했는지 알 것 같다. 인간이 흉내 내기에는 너무나 가벼우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넘보지 못할 기품이 서려 있다. 무용수가 두 팔을 펼쳐 깃처럼 흔들고 발끝을 들어 땅을 딛지 않는 듯 움직여 보아도 재두루미의 절반도 닮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들의 곡선을 사랑했고 그 속에 담긴 초월의 기운을 동경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자신이 닮고 싶은 존재를 흉내 내며 살아간다. 심지어 죽어서라도 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곧 ‘새’였다. 영혼이 날아간다는 비유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만 그런 건 아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새를 숭상했다. 원시 부족들은 새를 신의 전령으로 여겼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새가 시조(始祖)였다. 남방에서 숭배한 용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족(鳥族)의 흔적이 있다. 용이 새인지 큰 뱀인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이는 용족과 새족이라는 두 상징체계가 대륙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얽히고 진화한 결과다.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향한 인류의 상상력은 늘 신성함을 부여했다. 날 수 있다는 능력은 인간에게 금단의 세계였으니, 그 상실감이 숭배로 이어진 셈이다.
백제의 예술에서도 새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중 정수라 할 수 있는 ‘부여 능산리 대향로’를 보면, 맨 꼭대기에 봉황이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봉황은 신성한 새이자 군왕의 이상적 상징이며, 하늘을 관장하는 존재다. 그 아래로 용과 코끼리, 악어 등 육지와 물의 생명들이 층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우주관을 상징하는 배열이라 한다. 하늘-땅-물의 세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가 ‘새’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바라던 이상, 그리고 자연과 신을 잇는 매개체의 자리는 언제나 하늘을 나는 존재에게 돌아갔다.
재두루미를 따라 파주의 겨울 벌판을 거닐다 보면, 이런 옛 사유가 왜 생겨났는지 이해하게 된다. 저 너머에서 한 무리가 날아와 착지하는 장면은 마치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가 내려앉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얀 몸통과 잿빛 머리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흔들리는 모습은 거의 신화의 풍경에 가깝다. 그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사람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우아한 사절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늘 어떤 존재를 올려다보며 살았다. 신을, 자연을, 태양을, 그리고 새를. 올려다본다는 것은 경외하는 것이고, 경외하는 것은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재두루미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 품었던 그런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비록 날아오르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마음만은 하늘을 향해 열린 존재였음을.
겨울의 강가에서 재두루미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순간 바람 소리까지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을 따라 나 역시 시선을 돌렸지만, 그 눈빛이 향하는 곳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세계 너머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바람의 길이 있고, 계절의 선이 있고,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을 약속한 어떤 본능의 지도가 있을 것이다.
재두루미의 계절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그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지만, 나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이런 식이다. 우리가 닮고 싶어 했던 존재, 우리가 꿈꿨던 자유, 우리가 경외해 왔던 생명. 그 모든 것이 한 마리 재두루미의 날갯짓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인간 세상의 소란에서 잠시 벗어나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생명의 리듬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듯한 평안을 느낀다. 재두루미는 결국 새이지만, 나에게는 겨울마다 찾아오는 스승 같은 존재다. 하늘을 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땅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왜 사람의 마음이 늘 위를 향했는지를 알려 주는.
그런 점에서 재두루미의 계절은 단순한 철새의 이동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다시 한번 ‘올려다보는 법’을 배우는 계절이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