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과 계동의 생김새
Written by 권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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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태어나서 5년 동안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워낙 어렸던 시절이라 특별한 에피소드나 선명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항상 계동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에 그리움이 밀려온다. 계동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이 동네를 떠난 이후에도 여러 번 방문했다. 하지만 갈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동네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다. 내가 알사탕을 자주 사 먹었던 작은 동네 슈퍼는 베이커리로, 동네 목욕탕은 프랜차이즈 안경점이 되었다가 지금은 카페를 겸한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우리 옆집은 액세서리 가게로, 앞집은 옷가게로, 그 옆집은 카페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집은 칼국수 가게가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기억하는 동네와 전혀 다른 곳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계동은 상업화되면서도 옛 모습을 간직한 곳들이 꽤 많다. 계동의 모습이 더 많이 변하기 전에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기록하기 위해 이 동네를 자세히 관찰해보기로 했다.
계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삐뚤빼뚤한 지형이다. 서울의 다른 동네들과 달리, 계동은 이웃한 원서동, 가회동과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계동으로 들어갔다가 원서동을 지나 다시 계동으로 이어지는 골목들도 있고,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 보고 있는 집들이 한쪽은 계동, 반대쪽은 원서동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작고 좁은 골목을 탐방하는 재미가 있다. 왜 이렇게 구획이 복잡하게 나뉘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계동의 역사를 찾아보니, 이 지명은 조선 초기에 궁핍한 백성들을 위한 의료 및 구호 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이 위치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시설의 이름을 따서 '제생동'으로 불렸는데, 시대가 흐르며 '제'와 '계' 발음이 혼동되면서 '계생동'으로 변했다. 그 후 1914년 토지조사사업 때 '계생동'이 '기생동(妓生洞)'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생'자를 떼어내고 현재의 '계동(桂洞)'이 되었다. 지금도 현대 본사 사옥 앞에는 과거 제생원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제생원터' 표지석이 남아있다.
계동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하면서 여러 관청들이 자리했고, 자연스럽게 양반과 평민들의 거주지로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더 이상 이 동네에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많은 양반들은 저택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건설회사 건양사의 정세권이 계동, 가회동, 삼청동 일대 양반들의 주택을 구입해 기존 주택들을 헐고 'ㄷ'자 형태의 세미형 한옥들을 지어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집들을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온 조선인들에게 분양했기에 오늘날 북촌의 독특한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계동의 복잡한 생김새는 기존의 큰 저택을 허문 자리에 작은 한옥들을 여러 채 지으면서 필지가 작게 나뉘어 구획된 데서 비롯되었다.
계동의 생김새에 깃든 역사를 알고 나니,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동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비록 많은 것이 변했지만, 골목골목에 스며있는 정취는 여전히 나의 계동을 지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