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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7. 2024

<선재 업고 튀어>의 철학 "운명을 거스르는 방법은?"

제목이 왜 '선재 업고 튀어' 인지는 드라마 초반에 바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영화 <졸업>처럼 여주가 남주 류선재를 업고 튀는 장면이 있는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가수이자 배우인 '류선재'의 열성팬인 여주의 닉네임이 '선재 업고 튀어'인 것이다.

여주 임솔은 남주 류선재를 몇번이라도 업고 튀고 싶을 만큼 진짜로 사랑한다.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류선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가 죽는 것보다는 류선재의 운명에서 스스로 빠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빠질 수 없다! 운명이라서. 빌어먹을 운명 때문에.


비극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초절정 인기스타 류선재는 하반신 마비의 임솔에게 살아갈 희망을 선사한 수호천사 같은 존재이다.

그런 류선재가 한강 다리 위 눈오는 밤, 강렬한 키스같은 만남을 가진 뒤 돌연 자살한다.

우연히 타임슬립 기능이 있는 전자시계를 획득한 임솔은 류선재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회귀한다.

그러나 몇 번을 회귀해도 류선재는 죽기를 반복한다. 도무지 살릴 수 없다.

알고보니 류선재가 죽는 이유는 매번 그녀를 구하려다가 죽는 설정이다.

깨달았다. '내가 그의 운명에서 빠지자. 선재가 죽느니 나를 모르는게 낫다'


이런 공식으로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80년대 비극적 사랑의 클리셰를 2024년에 재현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사실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쓰고 싶었던 철학적 주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은 과연 되돌릴 수 있는 실체인가? 논리적으로 왜 타임슬립이 불가능한지, 시간에 대한 물리학적 연구의 첨단이라 할 수 있는 양자중력을 소개해 볼까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14회와 15회를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선재 업고 튀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까지 의심받을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임솔 "운명이 뜯어 말리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에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참으로 집요할 때가 있습니다. 몇 번 반복해서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세요. 나도 있습니다. '왜 그때 파리로 떠나지 않았을까?'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말합니다. 운명이라고.


'선재 업고 튀어'의 운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일직선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순환사관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순환사관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믿음인데 기원을 따져보면 고대 로마시대까지 올라갑니다.

로마의 5현제 중 한명이면서 철학자이기도 한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4.  "모든 것은 영원하고 변함없는 순환 속에 있으니, 동일한 사물이 1백 년이나, 2백 년, 아니 무한한 시간 동안 관찰된다고 해도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28.  "우주 만물은 위로 아래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늘 똑같은 순환 운동을 한다."   


순환사관에서는 인간의 운명이 반복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번 선재를 구하지 못했으면 몇 번을 더해도 결과는 똑같다는 겁니다. 허무하지만, 허무한 만큼 위로가 됩니다. 내 잘못은 아니니까요. 운명이 가혹한 것이니..


그러나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기독교적인 사관이 주류가 되면서 순환사관은 이단으로 몰렸고 대중에게서 잊혀졌습니다.  

순환사관이 재조명된 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덕분입니다.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니체


열역학 1법칙인 에너지보존 법칙에 심취한 니체는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원래 순환사관은 고대 인도의 '우주의 사건은 12000년에 한번씩 회전한다'와 같이 큰 순환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개인의 운명에도 적용됩니다.


존재는 생성의 의미이기 때문에 끝이 없고 '힘에의 의지'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며 살아가기를 계속 반복한다고 주장합니다. 니체의 주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죽으면 끝이 아니라 삶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초극'의 의지로 운명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로 변화와 초극을 추구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느냐. 반대로 운명이 바뀌면 그건 반복이 아니지 않느냐. 뭐 이런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관람차 같다."  -'선재 업고 튀어' 중


아무리 구하려 해도 구해지지 않는 류선재와 같이 결과가 똑 같다면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하라는 말일까요?

니체의 삶을 보십시오. 반평생을 치료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며 아싸(아웃사이더)로 살다가 제정신이 아닌 광인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세계가 그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런 인생일지라도 반복해서 살만한 것인가요?


운명이 반복되는 이유는 선택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임솔은 선택을 바꿔 과거에서 류선재를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운명을 뒤틀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임솔만의 것이 아닙니다. 류선재의 운명이기도 했죠.


류선재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필연 같은 거 말이야. 그렇다면 내 운명은 과거 현재 그 어떤 시간 속에서 만났더라도 널 사랑하게 된다는 거야."


류선재는 반복되는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끝없이 임솔과의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죠. 아마 이점이 이 드라마가 사랑받았던 이유일 겁니다. -류선재가 변우석이어서 더더욱

반복되는 건 비극만이 아닙니다. 삶의 작은 부분이라도 사랑과 같은 핵심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반복되는 비극을 볼 것인가? 반복되는 사랑을 볼 것인가?


그런데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습니다. 왜 하필 사랑일까요? 제 말은 타임슬립의 기회를 얻었을 때 대부분의 픽션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회귀한다는 겁니다. 로또나 부동산도 있는데.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가 의식주 이상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sns의 대유행만 봐도 커뮤니케이션 욕구는 식욕 이상으로 본능인 듯 싶습니다. 특히 연인이나 자식 같은 특별한 관계라면 앞뒤 재지 않고 목숨을 내던지는 경우도 숱하게 봤습니다. 가난이나 질병 등 어지간한 비극은 사랑 앞에서 상대가 안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비극적이라도 반복되는 인생을 몇 번이고 다시 살고 싶은 사람도 있나 봅니다. 니체처럼.

 

늘 그렇듯 이런 문제에 정답은 없습니다. 모든 건 선택이죠.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해도 또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같은 선택일지라도.


그리고 또 압니까? 짧은 주기의 비극적 운명이 몇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행복으로 가는 더 큰 주기의 운명이 반복될지.  



이 드라마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기억은 영혼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사실 운명이 반복되려면 선택이 반복돼야 하고 선택이 반복되려면 개인의 아이덴터티가 보장돼야 하는데 여러 픽션에서 다시 태어나면 전생의 기억은 잃는게 기본 설정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이 영혼 속에 스며든다. 훌륭한 대답입니다. 기억하지 못해도 영혼은 알고 있다. 영혼 그까이꺼 아무 쓸모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훌륭한 역할을 해준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혼 아니면 달리 무엇이 그런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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