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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0. 2024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100분의 1 따라잡기

'논리철학논고'의 이해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내 업적을 보아라. 그리고 모두 절망하라!'

황량한 사막에 대제국을 세운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 그의 광오함을 연상 시키는 셀리의 소네트입니다.


*영화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인공지능 로봇 월터가 창조주의 창조주인 외계문명을 멸망 시키며 읖조리는 시詩이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최전방 관측소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면서도 <논리철학논고>의 중요 부분을 작성합니다. 미칠 일이죠. 이쯤되면 천재라도 정말 재수없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에게 1차 세계대전 중 뭘했냐고 기자가 묻자, '난 율리시즈를 썼소. 당신은 뭘 했소?' 라고 되물어 기자를 당황하게 했다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대포가 날아드는 그 와중에 당대 철학자들을 '절망'시킬 논문(철학서)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한 뒤, 철학적 문제는 다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시골에 쳐박혀 꼬맹이들을 가르치던 비트겐슈타인은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시골에서도 쫓겨납니다.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복귀하죠.


1929년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 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던져 버린 원고를 러셀이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묻혀 버렸을 세기의 천재가 세상 앞에 우뚝 선 순간입니다. 그는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너무나도.


왕 중의 왕, 연예인의 연예인, 철학자의 철학자, 이 광오하기 짝이 없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중 <논리철학논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마 그가 살아 있더라면 제 글을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뭘 어떻게 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네. 그러니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횔덜린의 시詩나 읽기를 정중하게 권하네."

<논리철학논고>

1 세계는 일어나는 일의 총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논리철학논고>의 가장 첫번 째 선언입니다. 이 두 문장을 이해하면 앞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기 한결 쉬워집니다.


전통적인 인식론에서 인간의 인식과 독립된 사물들의 세계, 혹은 실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항상 논란거리였습니다.


영화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미디엄으로 잘 구어진 스테이크를 씹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거대한 시스템에 연결된 채 다른 인간들을 분해해서 만든 영양죽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감각은 인간을 속이는데 능숙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감각을 촉발하는 실체가 진짜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을 촉발하는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논리적 근거는 찾기 쉽지 않습니다.


이 해묵은 논란을 비트겐슈타인이 한줄에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일컫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의 합이 아니라 '일어난 일', 즉 사실(fact)들의 총체일뿐이라고.


사물의 총체와 사실의 총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물의 총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입니다. 하늘, 땅, 바다, 인간,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등등 이런 모든 것을 합친 것이죠.


그럼 사실의 총체는?

사실은 일어난 일을 뜻합니다. 신문 기사에 가장 많이 나와 있죠. 그렇다면 일어난 일들의 총합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개인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이벤트, 하늘이 파랗고 음식이 맛있고 음악이 아름답고 뿐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한다 하고, 회사에서 월급을 인상했으며 친구와 교토 여행을 다녀온 것,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이 (나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감각기관이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 생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사람에게 세계는 그냥 고요한 암흑일 뿐입니다.  


2.1 우리는 우리에게 사실들의 그림들을 그린다.

2.141 그림은 하나의 사실이다.


사실(일어난 일)들의 그림에는 대표적으로 언어가 있습니다. 또 미술이나 음악 등 현실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림에 포함됩니다.

세계는 사실의 총체인데, 그림이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인간이 현실을 표현한 모든 것의 총체가 세계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됩니다.


세계 = 사실의 총체 = 그림의 총체 = 포괄적 의미의 언어의 총체


그러면 이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이 철학사적으로 왜 중요할까요?


바로 인식 바깥의 실제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어떻게 있느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등 존재론과 인식론의 주요 쟁점을 단박에 해소해 버렸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이 모두 수긍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당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애초에 '세계'에 대해 잘못 정의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죠.

다시말해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세계'를 재정의하면 논쟁할 거리가 별로 남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요.


4.003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래서 철학사적으로 인식론, 존재론의 시대는 가고 언어철학, 분석철학, 과학철학 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사고는 '논리적 그림'이라는 것인데, 그림 중에 논리적 성질을 명확하게 띄고 있는 것은 언어입니다. 그래서 '논리적 그림=논리적 언어=사고' 공식이 성립니다. 그리고 사고는, 즉 생각은 논리적 언어로 수행한다는 것이죠. 복잡하기는 해도 결론은 단순해요. 생각을 당연히 언어로 하는 것이지. 그렇고 말고.

그래서 이렇게,


4.001 명제들의 총체가 언어이다.

4.01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4.112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결국 언어로 언명되는 세계에 대한 반성의 학문입니다. 인식 바깥의 뭔지 모를 세계는 철학의 대상이 아닌 것이죠. 더불어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라고 제한합니다. 이것 외에는 철학의 대상도 목표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부터 슬슬 멋진 말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들었던 말들.


4.116 좌우간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언표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언표될 수 있다.


생각을 명료하게 하려면 언어를 용법에 맞게 명료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쓰는 자연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애매모호한 표현이 너무 많죠. 그래서 철학적 탐구를 제대로 하려면 현실에 지시 대상이 있는, 즉 의미가 없는 언어는 모두 퇴출시키고 명제화가 가능한 논리적 언어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명제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명확한 의미(대상)을 가지고 있고 참/거짓이 판명 가능해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랑 문제로 남녀가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무슨 소리, 원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니가 생각하는 사랑이 뭔데?"

"하루에 네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번 웃고, 여섯번의 키스를 하는 거."

"헐. 그렇게 구체적이었어?"


이 둘은 무한히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에 가도 누가 옳은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 대상이 없는 무의미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유명한 말입니다. 주의할 점은 '나의' 입니다.

사실의 총체가 세계, 사실을 언표할 수 있는 것은 언어, 그러니까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입니다. 나의.


5.61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생각은 논리적 언어로 해야 하는 것이고, 생각 못하면 언어 못 쓰는 것이니, 당연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무의미한(대상없는) 헛소리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제 다왔습니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유명한 말은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철학적 탐구를 할 때 언어의 오사용에서 오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의미)이 없거나 모호한 언어로 철학적 논점을 흐리지 말라는 뜻이죠.  


소결론을 정리하면,

언어의 한계 = 생각의 한계 = (나의) 세계의 한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이 받아들이기 만만치 않고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가 '내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라고 해석하면 조금은 납득이 됩니다. 이렇게만 생각해도 우리끼리 하는 말싸움의 상당수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너랑 나랑 '그것'에 대해 다른 의미로 다투고 있어서 생기는 오류야!"


이렇게 말하면 더 싸울까요?



비트겐슈타인은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3명의 형이 모두 자살하는 비운을 겪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 유산의 3분 1을 예술가에 기부하고, 나머지 재산도 대부분 가족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는 평생을 검약하며 살았고 철학 보다는 횔더린의 시를 암송하며 여가를 보냈습니다.


<논리철학논고>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학 기호들이 상당하지만 다음처럼 살짝 로맨틱한 문구도 있습니다.


6.43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6.431 비록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게 아니라 끝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6.4311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왕 중의 왕이라 스스로 칭했던 람세스 2세의 석상은 몸통은 없고 다리와 머리만 모래에 파묻혀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 입술에 세상에 대한 조소를 품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세월 앞에서 스러져갈 운명이었습니다.


<논고>를 필두로 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게 공격 당하고, 현재 학파도 초기와 후기로 나눠져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적 역시 비트겐슈타인이라니.. 여러모로 놀라운 인간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랫만에 <논리철학논고>를 정자세로 정독했더니 영혼이탈증세가 오고 있습니다.

실제 저는 99% 이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이해하는데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시 틀린 해석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가 주십시오.  


"A Lannister always pays his debts"

"눈에는 눈, 구독에는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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