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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15. 2024

나로 죽어야 할까? 타인으로 계속 살아야 할까?

<눈물의 여왕>과 <경성크리쳐> 속 삶의 의미

가끔은 드라마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종류의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단한 감동이라는 게 아니라 '감동'이라는 글자 그대로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이다.


<경성크리쳐> 극악한 일본군이 한국인 생체실험으로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픽션, 6화.

주인공 박서준의 엄마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기자 아들을 방바닥 지하공간에 숨기며 이렇게 말한다.


"살아라. 살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겠다고 애미랑 약속햐, 이?"


어머니의 유언 대로 '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은 박서준은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며 그 험한 일제시대 살아냈다. 그를 향한 어떤 비난도 '살아 간다'는 제1목적을 흔들지 못했다.

하긴 인간이 스스로 살겠다는데 삶의 방식이 어떻든 무슨 자격으로 이를 비난할 수 있겠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 대령의 역을 맡은 말론 브랜도는 미국 정부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낸 것에 대해 그 상황을 이해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You have no right to judge me!"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를 비난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죽일 권리는 있어도 비난할 권리는 없다는 뜻이다. 동의한다. 미국정부가 옳고, 그가 틀렸다는 것까지 인정할 필요는 없다. 강자가 승리했다고 정의마저 쟁취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개인이 살아갈 권리는 무엇보다 소중하며, 그 방식 역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역으로 개인이 살지 않겠다는데 막을 방법도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으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나'를 망치겠다는데 정부가 무슨 권리로 막는 것이냐 항의했다.


영국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마스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다가 끝내 과도한 음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끝까지 저항하라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인용된 유명한 시를 남겼다.


"분노하라. 분노하라. 꺼져가는 저 빛에 분노하라. 아버지, 어둑한 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시라."

 

역설적이다. 아무리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지만 나의 의지는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죽음을 거부한 작가 수전 손택,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죽음이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세 번의 암투병을 이겨냈고 백혈병으로 사망했을 당시 71세였다. 그 정도면 죽음과의 전투에서 졌을 지언정 인생이라는 전쟁에서는 이겼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죽음과 희생이 삶보다 소중한 가치였던 시대가 있었다. 중2 영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억지로 외우게 해 아직까지 기억나는 문장이 있다.

'I would rather die than disgrace myself.'

수치를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 실제 조선시대 여인들이 은장도로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 일본의 사무라이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을 했다는 이야기, 역사 속에 죽음을 미화한 스토리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현대는 다르다. 가치가 바뀌었다.

<눈물의 여왕>의 여주 김지원은 희귀병에 걸려 뇌수술을 해야 살 수 있지만 수술을 하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남편 김수현은 일단 살고보자는 논리이고, 김지원은 기억을 다 잃고 사는게 무슨 의미냐며 죽겠다고 고집한다. 기억을 잃으면 더이상 자신이 아니니 '나로서' 죽겠다는 논리다.

생각해볼 문제다. 나를 정의하는 것이 기억일까? 얼굴이 바뀌어도 나, 팔다리가 없어져도 나인데, 기억이 사라지면 내가 아니라는 주장은 뭔가 공허하다. 그러나 기억도 아니라면 자기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더 혼란스럽다.


그러나 김수현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선택하지마. 생각도 하지마. 그냥 내말 들어. 너는 살아. 사는거야. 제발. 살자."


살다보면 생각이 필요없는 순간이 있다. 생각할수록 오류에 빠지고 절대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선택이 필요없는 순간도 있다. 선택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길이 하나뿐인 경우다. 대표적인 선택지가 삶이냐 죽음이냐.. 이 경우 죽음은 선택지가 아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남긴 명대사일뿐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요즘 들어 감성을 자극하는 복잡한 대사보다 짧은 한마디가 큰 울림을 주는 경우가 꽤 있다.

<존윅4> 케인(견자단)의 손에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아키라가 칼을 집으려 하자 케인이 이렇게 말한다.

"Don't.   live."

아키라도 싸워봐야 개죽음일 것이라는 알고 있지만 자식된 도리로 복수를 해야 한다. 거기에 케인이 일침하는 것이다. "칼을 들지마. 살아라."


총칼이 난무하며 수백 명의 사람이 우습게 죽어나가는 <존윅>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죽여대면서 살으라고 하다니.


어쨌거나 '살아라'는 지상명령은 '선을 행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보다 더 큰 울림이 있다. 또 인간이 살아갈 권리는 어떤 권리보다 우선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게 살아갈 의지다. 이리 살아서 무엇하나. 희망이 없으니 꿈이 없고 꿈이 사라지니 기대가 없다. 오늘과 내일이 똑같고 과거와 다르지 않은 미래가 예상된다. 

나는 모든 시간대에서 똑같은 절망과 굴욕을 맛보게 돨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시간의 맛이 똑같다.


‘병든 나무처럼 영혼이 부대낄때’ 그 어떤 명언도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살아라' 하는 단순한 한마디가 힘이 될 수 있다. 


살아라. 살아라.

눈물아 난다.


“나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에게도 그 정도 권리는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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