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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22. 2024

언어가 없는 영혼

넷플릭스 <삼체>와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나의 언어는 부족하다.

침묵은 소극적인 저항이지만, 마지막 수단이다. 나의 침묵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슬픔이다.

슬픔도 정확하지 않다. 역시 언어이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은 정확한가? 정확하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있나?


선불교에서는 '직지인심'이라고 하여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을 직접 가리키라고 조언한다. 언어는 개념적이고 상대적이라 깨달음을 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은 언어를 통해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경험으로 얻어야 한다는데..


여기서 직관적인 경험은 여행하고 친구 만나고 드라마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일상 속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좌선을 통해 영적인 직관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도무지 언어화 할 수 없는 깨달음이 어떤 경지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주나 세계의 원리가 쉽게 언어화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어화 되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니까.


우주의 원리는 그렇다치고, 솔직히 나와 큰 상관도 없고, 내 인생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해프닝이나 감정의 변화 정도는 언어화 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서 말하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는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마른 똥 짝대기다."

"??"


선문답은 비논리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 닮았다. 또 언어의 파괴라는 점에서 해체주의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언어의 용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하고 싶지 않은 내 감정을 선문답에 담아야 하나?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선문답도 아니다.


나는 애초에 언어를 갖지 않고 태어났으면 좋았겠다. 내 영혼에는 언어가 없어야 했다. 언어는 영혼을 오염 시키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나는 불운하다. 내 인생은 망했다. 내 노력은 허사다.

이런 말들이 나를 병들게 한다. 불운이니 인생이니 노력이니 하는 언어는 모두 잘못됐다. 심지어 내가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고 믿게 한다는 점에서 사악하기까지 하다.

언어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고 그런 단어들의 뜻에 지배 당하고 있다. 만약 내가 불운이라는 단어를 몰랐다면 내가 불운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나? 나를 불운하다고 규정 짓는 순간 나는 정말 불운해지는 것이다.  


인생이 무엇인가? 내가 인생이라고 규정하는 게 정말 인생일까? 내가 할 만큼 했다고 믿는 '노력'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애초에 '노력'이라는 것은 없는게 아닐까?


모든 것을 의심한다. 의심이라는 단어도 쓰기 조심스럽지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미드 <삼체>에서 외계문명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능력이라 말하는 텔레파시 같은 것을 사용해 의사소통을 한다. 정신적인 소통수단을 통해 생각을 직접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데, 지구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오죽했으면 자신들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는 발견만으로 지구인은 우호의 대상이 아니라 말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가능한 전제의 오류이겠지만, 내가 <삼체>의 외계인과 같이 음성언어가 아니라 정신적 의사소통 수단이 있다면 세계와 인생, 의미에 대해 보다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잘못된 언어사용에서 오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나의 고뇌와 우울은 그저 내 본성인가? 표현이 없는 침묵 속에서도 나는 괴로워할 것인가?


언어의 주관성은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또한 사랑과 아픔 등 추상적인 개념은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언어는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어 이종 언어간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하고 해당 문화를 완벽히 이해하지 않는한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누구도 자기가 속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의 언어를 내가 이해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어떤 면에서 모국어가 제1외국어가 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경험이나 기술에 대한 언어가 없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신조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더욱 불완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명확하게 하려 했고, 니체는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 역시 언어는 존재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도구로 불완전하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나는 당신들의 언어에 관심없다. 오직 나의 언어, 내 영혼의 언어가 골치덩이일 뿐이다.

내 언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애초에 언어가 없는 영혼으로 태어나지 못한 나를 원망해야 할까?


자크 데리다는 언어의 해체를 주장했다. 텍스트와 의미구조를 면밀히 분석하면 그 안에 숨은 불확정성, 불안정성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작업을 통하면 내 언어는 완벽해 질까?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이라는 용어는 차이와 지연을 결합한 개념인데 한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서 정의되고, 이 과정에서 의미가 서로 미끄러지며 변화한다고 한다. 결국은 언어의 뜻은 완전히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이 유동적인 언어에 의지하는 내 사고(thinking)란 얼마나 불완전하고 모순적인가?


그리하여 즐겁고도 슬픈 것이 가능하고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도 있고,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은 순간들이 생겨난다.


데리다는 또, 말하기에 비해 쓰기는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지연시키는 언어의 불확정성을 더욱 드러낸다고 말했다. 내가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글로 쓰는 것이 더 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차라리 친구에게 우울하다고 말하면 순간적인 감정의 요동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사건을, 일기에 적음으로써 다시 읽고, 곱씹는 과정에서 더 깊은 생각중독에 빠트리는 것이다. 생각을 정화하기 위해 시작한 내 일기가 나를 더욱 병들게 한다니.. 이럴 수가..  


언어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린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미국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손택은 언어가 감정과 경험을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하니, 예술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을 쓰지 말고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면 언어가 없는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림도 못 그리고, 할 줄 아는 악기도 없는데? 아니면 이런 에세이는 그만 쓰고 소설만 써야할까? -나의 에세이가 더 많은 언어의 함정을 파고 있고 그 함정에 제일 먼저 뛰어 드는 독자 역시 바로 나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년으로 갈수록 철학하기 보다 횔더린의 시를 낭송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벽을 보며 시를 읽기도 했다는데.. 처음 이런 에피소드를 접했을 때 나는 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나, 어떤 말로도 위로 받을 수 없을 때, 한 글자 타이핑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무기력한 나에게 시詩 한소절을 선사한다. 이렇게.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이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환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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